이상이 화가를 꿈꾸며 그렸던 그림 몇 편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그의 자화상(自畵像)이다. 자신의 붓끝으로 자기 얼굴을 그려내는 이 특별한 형식의 그림은 그리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얼굴은 자기 눈으로 직접 들여다볼 수가 없다. 거울을 통하여 비춰진 영상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거울 속의 얼굴 모습은 사실적 형상의 입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거울은 모든 것을 평면적 영상으로 재현하기 때문에, 거울을 통해 보이는 코의 높이도 눈의 깊이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 집착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 대놓고 보듯이 그렇게 생생하게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얼굴을 그리는 작업은 초상화(肖像畵)의 사실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자기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 더욱 강조되고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부분은 소홀하게 취급되기 일쑤다. 그러므로 자화상은 자기 집착을 드러내는 욕망의 기표로도 읽힌다.
이상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 가운데 1976년 잡지 《독서생활》(1976. 11)에 <이상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소개된 것이 있다. 이 그림은 이상 연구의 선봉에 섰던 임종국에 의해 발굴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재미있는 책이 발견되었다. 이상의 자화상과 친필 사인과 낙서 한 구절이 적혀 있는 이상의 장서 한 권이다. 책 이름은 줄 르날의 《전원(田園)수첩(手帖)》이다. 동경 간다구(神田區) 진보정(神保町) 3정목(三丁目) 21번지 금성당(金星堂) 발행이며, 역자는 廣瀨哲士, 中村喜久夫 양인. 소화(昭和) 9년, 1934년 9월 10일 발행된 2백면의 책이다.
이상이 이 책을 소유했던 시기는 첫째 국내 시장에 배부되는 시간을 계산해서 1935년무렵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발행 1935년 9월인 책이 국내 시장에 배포되려면 아무래도 6개월 정도는 걸리지 않겠는가?
둘째 1936년 10월-1937년 4월에 걸쳤던 동경 시절의 장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근거는 그 책이 동경 간다구 진보정 3정목 21번지에 주소를 둔 금성당 발행이라는 점이다. 당시 이상의 동경 주소는 간다구 진보정 3정목 101-4(이 주소는 3정목 10-1-4를 잘못 읽은 것임) 이사카와(石川)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몰후 이상의 유물은 부인의 손으로 일체 한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경위는 어떻든 간에 이상의 지문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손때 묻은 장서가 40년이 지난 오늘에 발견 됐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 책을 1935년 무렵에 소유했다고 하면 다방 <제비>를 폐업하기 전후가 된다. 이때 이상은 <제비> 다방 뒷방에서 금홍이와 동거했으며 <제비>를 폐업한 후 <69> <무기(麥)> 같은 다방과 카페 <쓰루(鶴)> 등을 경영하다 모두 실패해 버린다. 그리고 재생을 기약하며 동경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반면에 동경 시절의 장서였다면 사상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기 직전이다. 까치 둥우리 같은 두발과 서가에서 발견된 불온한 몇 권 책으로 해서 이상은 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구금된다. 건강 악화로 보석된 지 1개월 미만에 그는 영면하고 말았다.
이 책에 적힌 다음의 낙서(원문 일어)는 그 어느 시기의 심경의 고백이다.
이놈은 아주 패가 붙어버린 요시찰 원숭이
수시로 인생의 감옥을 탈출하기 때문에
원장님께서 심려한단 말이다.
이상의 경우라면 동경으로 갔다는 자체가 인생의 감옥을 탈출함이었다. 세기말적 불안 속에서 이방인처럼 살다간 이상은 결국 그 자신의 낙서가 고백하듯이 아주 고약한 패가 붙어버린 한 마리의 ‘요시찰 원숭이’가 아니었을까? 일상의 틀 속에서 수시로 탈옥을 감행하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이 자화상은 이상의 가장 말기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상의 친필 사인은 필자가 아는 한 이것이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상의 필적은 있었지만 친필 사인 만큼은 발견된 것이 없었다. 따라서 희한하고 소중한 서명이다. <姜敏(시인)씨 소장>
이상 연구의 권위자인 임종국에 의해 소개된 이 글은 <자료>라는 이름으로 이상의 그림 한쪽과 함께 잡지의 권두에 수록되어 있다. 임종국의 소개에 의해 이 글과 함께 소개된 이상의 그림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상의 자화상으로 인정되어 널리 알려졌음은 물론이다.
임종국이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줄 르나르의 <전원수첩>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을 추억하는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사실 하나로 이 책의 소장자를 이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 책에 그려놓은 그림에 붙인 ‘李箱’이라는 사인을 보면 이 책이 이상과 관련된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상이 줄 르나르의 <전원수첩>을 즐겨 보았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통해 확인된다.
(1) 어느날 상허(尙虛)의 경독정사(耕讀精舍)에서 몇 사람의 벗이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시인 이상은 줄 르나르의 <전원수첩> 속에서 읽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겨울날 방안에 가두어 두었던 카나리아는 난로불 온기를 봄으로 착각하고 그만 날개를 푸닥이며 노래하기 시작하였다고-.
우리는 르나르의 기지와 시심을 일제히 찬탄했다. 그러나 결국은 시가 오류의 심리까지 붙잡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시인이 그 자신의 봄을 그리는 마음을 카나리아의 뜻없는 동작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이야기를 꺼내놓은 이상의 마음에도 역시 봄을 그리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그 감정을 그러한 실없는 듯한 이야기속에서라도 풀어버리는 게 아닐까. (김기림, 봄은 사기(詐欺)사, 1935)
(2) <제비>에 또한 실패한 이상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明治町에다 <무기(麥)>라는 다방을 또 만들어 놓았다. 그곳의 실내 장식에는 <제비>의 것에보다도 좀더 이상의 괴팍한 취미 내지 악취미가 나타나 있었다. 결코 다른 茶店에는 통용되지 않은 괴이한 형상의 다탁이며 사면벽에 그림이나 사진을 걸어놓는 대신 르나르의 <전원수첩>에서 몇 편을 골라 붙혀놓는 등 일반 선량한 끽다점 순방인의 기호에는 결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박태원, 이상의 편모, 1937)
(3) 그가 경영하느니보다는 소일하는 찻집 ‘제비’ 회칠한 사면 벽에는 주르 르나르의 에피그람이 몇 개 틀에 들어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상과 구보와 나와의 첫 화제는 자연 불란서 문학, 그 중에도 시일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르네 클레르의 영화, 단리의 그림에까지 미쳤던가 보다. (김기림, 이상의 모습과 예술, 1949)
이상이 줄 르나르에 대해 지니고 있던 관심은 이러한 기록들이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소개된 그림 자체이다. 이 그림은 연필 또는 펜으로 그려진 간단한 스케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림의 왼쪽으로 일본어로 쓴 문구가 적혀 있고 우측 하단에는 이상의 자필 사인이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으로 보아 이상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문구를 적어넣고 자신의 사인을 표시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과연 이상의 자화상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찬동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이상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의 대상 인물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상은 시력이 약하긴 하였지만 안경을 낀 적이 없다. 이상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 중의 하나인 문종혁의 증언에 따르면 이상은 ‘안경은 쓴 일은 없지만 강렬한 빛을 정시하지 못하였다. 시력이 약한 편’(몇 가지 이의, 문학사상, 1974, 4)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둥근 테의 안경을 끼고 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이상의 사진 가운데에도 안경을 낀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주인공이 이상 자신이라고 추단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그림의 인물이 이상의 절친한 문우였던 구보 박태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은 이상이 그린 박태원의 초상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림의 왼쪽에 적어 넣은 일본어 문구를 좀더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 이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これはこれ札つきの要視察猿
トキドキ人生ノ檻ヲ脫出スルノデ
園長さんが心配スルノテアル
(아, 이거야말로 꼬리표가 달린 요시찰 원숭이
때때로 인생의 울타리(檻)를 탈출하기 때문에
원장님께서 걱정한단다)
여기 적어넣은 문구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행태를 재미있게 묘사한 것이다. 특히 이 인물을 꼬리표 달린 ‘원숭이(猿)’라고 지칭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여기서 ‘원(猿)’은 박태원의 이름의 끝 글자인 ‘원(遠)’과 발음이 같은 데에서 연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자신은 이미 삶의 일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인생의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한다는 설명은 이상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적인 가정을 이끌면서도 예술적 충동을 이기지 못했던 박태원의 경우에 이러한 설명이 붙을 법하다.
이 그림을 박태원의 당시 사진과 견주어 보면 나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상이 인쇄소 창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때(1935-1936) 이상과 김소운이 나란히 책상 앞에 앉고 뒤에 박태원이 서서 찍은 사진이 하나 남아 있다. 여기에 나온 박태원의 모습만을 떼어내어 보자. 둥근 테의 안경을 낀 표정, 더벅머리에 갸름한 얼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입술과 콧날과 인중의 윤곽, 이런 것들이 모두 그림 속의 인물과 흡사하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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