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썸네일형 리스트형 한용운의 일본 시절 한시 한용운의 일본 시절이라는 표제는 그의 행적과 서로 부합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용운의 일생이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데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이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일본에 체류했던 것은 일년이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결행된 일본행에 대하여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반도 안에 국척하여 있는 것이 어쩐지 사내의 본의가 아닌 듯하여 일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는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하여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비단 불교문화 뿐 아니라 새 시대 기운이 융흥한다 전하는 일본의 자태를 보고 싶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관(馬關)에 내리어 동경에 가서 조동종(曹洞宗)의 통치기관인 종무원을.. 더보기 만해와 백담사 그리고 오현스님 설악의 백담 계곡은 언제나 아득하다. 여름 산사의 정취를 이곳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은 다시없다. 골은 깊고 물이 빠르고 산은 높푸르다. 그러나 험준한 설악의 계곡임에도 골골이 사람을 품을 만큼 넉넉하다. 여름내 계곡의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가 서늘한 바람을 일으킨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을 열던 해였다. 나는 백담사를 찾았다. 만해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나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만해 한용은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이 바로 이 백담사다. 그는 여기서 시집 (1926)의 시들을 썼다. 시집 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다.. 더보기 <한용운문학전집>을 간행하며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세상에 태어난 해가 1879년이니 한 세기가 훨씬 넘었다. 한용운은 충남 홍성의 외진 촌락에서 자라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던 그는 동학에 가담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가난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큰 뜻을 세웠다. 그러나 동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피하여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한 것은 나이 스물이 훨씬 넘어서의 일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불가(佛家)에 들어서서 불도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한용운은 일본의 세력이 확대되고 있던 1908년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문물을 두루 살피고 돌아왔으나, 경술년(1910)의 국치를 당하매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떠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 불교에 대항하여 침체한 한국불교의 혁신을 내세우면서 유명한 을 발표하였다. 그는 을..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