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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 낡고 작은 한옥에 이상을 기리는 ‘제비다방’이 문을 열었다. 이 집은 철거 대상이었던 것을 2003년 김수근문화재단(이사장 김원)이 매입하여 ‘제비다방’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공간을 꾸몄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과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가 2013년 4월 이상의 기일까지 ‘통인동 제비다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반에게 개방 운영한다. 이상과 관련된 문화예술의 소모임에 활용할 수 있고, 서촌 지역 주민들도 이용할 수 있다.
‘제비다방’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한옥은 이상을 양자(養子)처럼 데려다 키운 백부(伯父)의 집이 있던 자리에 서 있다. 이상은 바로 세 살 아래의 친동생 운경(雲卿)이 태어난 직후 생부모의 곁을 떠나 백부가 세상을 떠난 뒤까지 20년 가까이 통인동 154번지의 큰집에서 살았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보성고보를 마친 것도 이곳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3년 동안 다닌 것도 이곳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건축과의 기사로 취직하여 출근했던 곳이 이곳이다. 그의 첫 장편 <십이월십이일>(1930)과 첫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1932)이 여기서 씌어졌고,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과 일본어 연작시 <조감도(鳥瞰圖)> <선에 대한 각서> <건축무한육면각체> 등도 모두 여기서 발표했다. 이상의 삶의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니 이상의 삶과 그의 문학을 기리는 새로운 공간이 여기에 들어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얽힌 사연이 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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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집이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3년 1월 철거 직전에 건축가 김원 씨가 김수근문화재단을 통해 매입한 후 이상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하여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재로 등록(2004년 9월, 등록문화재 88호)하면서부터이다. 당시 통인동 골목길가에 서 있던 이 작고 낡은 집에는 작은 서당과 옷수선 가계가 있었다. 집 주인은 이 집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아넘기려고 계약을 맺었다. 천재 시인 이상의 창작 산실이었던 공간이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려 곧 헐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 원씨는 종로구청에 탄원서를 내고 건축가협회의 도움을 받아 위약금까지 물어준 뒤 매매계약을 파기하도록 했다. 김원씨는 이 집터에 이상 생가를 복원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집은 이상이 살았던 곳이 아니라 이상 사후에 이 땅을 매입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2008년 6월 근대문화재 등록이 말소되었다. 이런 저런 논란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일부 언론에서는 문화재 당국의 서투른 행정을 지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집을 2009년 7월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그대로 매입하였다. 비록 근대문화재 등록이 말소되었다 하더라도 이 공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는 이 자리에 이상의 생가를 복원하고 작은 기념관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도 차질이 생겼다. 서촌주거공간연구회를 비롯하여 일부 주민들이 이 한옥의 원형 보존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유산신탁은 2010년 6월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협조를 얻어 통해 4명의 건축가의 공동설계를 통해 한옥의 원형을 살리면서 소규모 문화예술의 활동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오늘의 ‘제비다방’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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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 관심으로 이 집을 여러 차례 찾았었다. <이상전집>(2009)을 새로 엮고 이상의 생애를 다시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이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를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통해 확인도 하였고, 이상의 생가와 백부의 가계(家系)를 확인하기 위해 제적부 등본을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조사를 통해 이상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 읽힌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밝혀내게 되었다.
이상의 호적(제적부등본)에 따르면 부친은 김영창(金永昌)이며, 모친은 박씨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연구서들이 이상의 부친을 김연창(金演昌)으로 표시했다. 이제는 잘못된 기록을 김영창으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김영창은 강릉 김씨 김석호(金錫鎬)의 차남으로 1884년 8월 17일 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상의 모친 박씨의 이름은 박세창으로 알려져 있지만 호적에는 ‘박씨’ 또는 ‘박성녀(朴姓女)’로 표시되어 있다. 이름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표기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이 기록에 따라 모친의 성함도 근거가 불분명한 ‘박세창’을 버리고 ‘박씨’ 또는 ‘박성녀’로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의 부친인 김영창의 호적 사유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차남은 결혼 후에 전 호주의 호적에서 분가되어 새로운 호주가 된다. 그러나 김영창의 경우는 결혼 후에 그의 형인 김연필의 호적에서 분가하여 새로운 호주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양조부(養祖父) 김학교(金學敎)의 후사로 입양되어 그 가계를 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좀더 정확한 사실 관계의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상의 가계에 관한 모든 기록은 1947년 소실되어 버렸고, 그후 재편된 호적에는 더 이상의 기록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이 호적의 기록을 따라가 보면 이상의 증조부(曾祖父) 김학준에게는 아우 김학교(金學敎)가 있었다. 김학교는 이상에게는 종증조부에 해당한다. 김학준의 경우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바로 이상의 조부인 김병복(金秉福)이다. 김병복의 소생인 두 아들이 이상의 백부인 김연필과 친부 김영창이다. 그러나 종증조부인 김학교는 딸 하나만을 두게 되어 후사를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연고로 이상의 부친 김영창은 김학교의 처인 강씨(김영창의 양조모)가 세상을 떠난 후 대정 2년(1913) 11월 3일 호주를 승계하여 종증조부의 가계를 잇게 된다. 결국 이상의 부친인 김영창이 종조부(從祖父)인 김학교의 양손(養孫)으로 그 호주를 승계한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호주 상속이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이상의 부친 김영창은 실형인 김연필과 호적상으로 6촌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상의 나이가 네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호적의 사유 란에는 김영창이 박씨와 결혼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 1녀의 소생을 두었다. 그 첫째가 김해경(金海卿)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이상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이상은 김영창과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명치 43년(1910년) 8월 20일 경성부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반정동(半井洞) 4통 6호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날짜는 음력이며, 이를 양력으로 바꾸면 1910년 9월 23일 토요일이다. 그런데 여기 표시된 순화방(順化坊) 반정동(半井洞) 4통 6호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가 없다. 조선 말기의 구역 표시였던 ‘순화방’에는 ‘반정동’이라는 지명이 없다. 이 지명은 일제 초기에 모두 바뀌었으므로 호적의 재편제과정에서 생겨난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유사 지명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박정동(朴井洞, 博井洞)이 있는데, 궁정동과 사직동의 중간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의 통인동도 여기 포함된다.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백부의 집에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이상의 결혼에 관한 내용도 호적상에 기록되지 않았다. 1936년 변동림과 결혼하였지만, 결혼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1937년 4월 17일 오후 12시 25분 동경시 본향구(本鄕區) 부사정(富士町) 1번지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부의원(附醫院)에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망 신고는 동거자 변동림(卞東琳)에 의해 계출되어 동월 22일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2남 김운경(金雲卿)으로 대정 2년(1913) 6월 29일 생이며, 셋째인 장녀 김옥희(金玉姬)는 대정 5년(1916) 11월 28일 생이다. 이상의 남동생 운경의 경우에도 호적부에는 결혼 사유가 없다. 김옥희는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深川面) 고군영동(古軍營洞) 713번지 문병준(文炳俊)과 1942년 6월 5일 혼인 신고하였으며, 동월 29일 제적되었다. 김옥희는 해방 이후 서울에 거주하였고, 1970년대까지 생존하여 문학사상을 비롯한 여러 잡지에 이상에 대한 회고담을 들려준 바 있다. 김옥희의 회고 <나의 오빠 이상>에 의하면 김운경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김운경의 호적은 2008년에 말소 처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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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백부 김연필의 가계를 제적부 등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김연필은 부 김병복(金秉福)과 모 최 씨 사이에서 명치 15년(1883년) 12월 3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김병복의 사망으로 호주를 상속받게 되었고, 본적은 경성부 통동 154번지이다. 김연필은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았고 하위직 관리로 일했던 중산층이었다. 김연필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그의 제적부가 전부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대한 제국 관보를 뒤지다가 우연히도 김연필에 관한 기록을 하나 찾았다. 융희(隆熙) 3년 1909년 5월 26일자 관보의 ‘휘보’ 가운데 ‘학사’ 란에 당시 관립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의 제1회 졸업생 명단 ‘金工科 專攻生 七人 金演弼 朴永鎭 李容薰 洪世煥 崔天弼 鄭致燮 李宗泰’ 의 맨 앞에 김연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관립 공업전습소의 기원은 대한제국이 설립한 농상공학교(1904)에서 시작한다. 이 학교가 1906년 8월에 농과는 수원농림학교, 공업과는 관립 공업전습소로 분리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에 「관립공업전습소 규칙」에 의거하여 한성부 동서 이화동에 설립되었는데 토목과, 염직과, 도기과(陶器科), 금공과(金工科), 목공과, 응용화학과, 토목과를 두었다. 공업전습소는 실제 업무에 종사할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을 그 주요 목표로 하여 보통학교나 소학교 졸업자들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하였으며, 그 수업연한은 2년이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설립되면서 시험소의 부설 공업전습소로 귀속되었으며, 1916년 4월 「조선총독부 전문학교 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존의 공업전습소는 학교의 부속기관으로 흡수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 제학교 관제」가 공포되자 경성공업전문학교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편되었다. 관립 공업전습소의 제1회 졸업생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김연필이 이상의 백부 김연필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공업학교 계통의 교원으로 계시다가 나중엔 총독부 기술직으로 계셨던 큰아버지 김연필 씨’라는 김옥희의 증언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이상의 경성고공 입학이 백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은 공업전습소 출신이었던 김연필의 경력으로 미루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김연필은 결혼 후 본처(기록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음)와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강릉 김씨 양반을 자처하던 집안 장손의 후대가 끊어지게 되자 김연필은 아우 김영창의 장남 김해경(이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후사를 이어가게 할 계획을 세웠다. 김영창은 두 아들(해경과 운경)과 딸 하나(옥희)를 두고 있었다. 마침 김영창이 종조부인 김학교의 양손으로 입적하어 호주를 상속하게 되어 지손(支孫)으로 분가하게 되자 김연필은 조카인 김해경을 그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이상이 백부 김연필의 양자였다는 말이 나돌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이상의 누이동생 김옥희의 회고에 의하면, 총독부 하급직 관리로 일했던 김연필은 결혼 후 자식을 두지 못하자 본처를 두고 어디서 아들이 하나 딸린 여인(호적상의 김영숙)을 소실로 맞았다는 것이다. 한 집안에 본처가 살고 있는데 소실로 김영숙이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게 되자, 이상에게는 큰어머니가 두 사람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본처가 곧 집을 나가버리자 김영숙이 정식 재판을 거쳐서 김연필의 처로 입적하였다. 이상이 경성고공에 입학했던 1926년의 일이다. 김연필은 김영숙이 데리고 들어온 아들도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가 바로 김문경(1912년생)이다. 제적부 등본에는 김영숙이 대정 15년(1926) 7월 14일 경성지방법원의 허가 재판에 따라 취적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아들인 김문경이 바로 뒤를 이어 대정 15년 7월 23일자로 호적에 입적되었다는 사유도 기록되어 있다. 김연필의 법적인 처가 된 김영숙(金英淑)은 평안북도(平安北道) 자성군(慈城郡) 자하면(慈下面) 송암리(松岩里) 382번지 부 김준병(金準柄)과 모 김씨의 3녀로 명치 24년(1892) 8월 9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김연필과 김영숙의 사이에 김문경(金汶卿) 대정 원년(1912년) 11월 11일 경성부 통동 154번지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문경도 호적에 입적한 것은 대정 15년(1926) 7월 23일이다. 모친 김영숙이 재판에 의해 취적 허가를 받은 후에 그 아들 김문경이 호적에 입적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상의 누이동생 김옥희는 1985년 11월 잡지 레이디경향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만 큰어머니는 한분이 아니라 두 분이 계셨습니다. 오빠가 처음 큰집으로 들어갔을 때는 집안에 자식이라곤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XX 씨는 나중에 들어온 새로운 큰어머니가 데리고 온 아들이지요.’ 라고 밝힌 바 있다. 김연필은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재빨리 신분의 변신을 꾀함으로써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총독부의 일을 그만두고 뛰어든 작은 사업으로 서북지역에 갔다가 애 하나 딸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김연필이 자신과는 혈연이 닿지 않는 김문경을 아들로 호적에 입적시킴으로써 김연필은 법적으로 소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김연필이 사망한 뒤에 재산 상속 등의 문제와 결부되어 가족 내에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김연필이 1932년 5월 7일 경성부 통동 154에서 나이 50으로 사망하자, 이 해 8월 4일 김문경이 호주를 상속하였다. 양자 입적을 계획했던 이상은 백부의 집안과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은 이 해에 건강상의 이유로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를 사임하였고, 1933년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의 요양 생활 후 백부의 소상을 치룬 뒤에 큰집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청산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상이 백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김연필의 사망 직후의 일이지만, 그는 이미 1926년 경성고공에 입학하던 해에 김연필의 법적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백모 김영숙이 정식으로 김연필의 처로 호적에 오르고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사내아이가 ‘김문경’이라는 이름으로 입적되어 김연필의 법적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은 1931년 통인동 154번지를 지분 분할을 통해 154-1과 154-2로 나누어 매도했다. 토지대장과 지적도의 기록을 보면, 통인동 154번지는 당시의 가옥과 대지를 합쳐 300평이 넘는 땅이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이 집에서 하숙을 하였던 이상의 친구 문종혁의 회고 <심신산천애 묻어주오(여원 1969. 4)>에도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상의 집(실은 상의 백부님 집)은 통동 154번지이다. 지금의 중앙청과 사직공원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순수한 주택으로서 안채와 뒷채, 그리고 행랑방이 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송판제 바라크 변소가 하나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기와집이었으나 얕고 낡아서 명실 공히 서민층의 고옥이었다.
이 집의 특색이라면 대지가 넓었다. 백여 평도 넘는 밭을 이루고 있었고, 밭에는 철따라 마늘이니 상추 같은 것이 심어지고 있었다. 늦가을이 되면 옥수수와 수수대만이 꺼칠하게 서 있었다. 흙냄새를 풍기는 집이었다. 바라크 변소가 이 밭 가운데 외롭게 달랑 서 있다. 후일 상은 이 변소에 앉아 달과 이야기하며 시상(詩想)에 잠기곤 했다.
안채는 우리나라 전형적 건물이다. 즉 안방에 대청 건너 건넌방, 안방에는 부엌이 달려 있다. 안방은 2간 장방이요 외광도 좋다. 상의 백부님과 백모님과 사촌동생 문경이의 거실이다. 대청 건너 건넌방은 안방과는 대조적이다. 좁기도 하지만 어두컴컴하다. 햇볕이라고는 연중 들지 않는 방이다. 이 방이 상과 상의 조모님의 거실이다.
김연필은 1931년 앞의 문종혁의 회고에서도 확인되는 백여평이 넘는 집뒤 텃밭을 154-2로 분할하여 매도하였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집만을 154-1로 소유하였다. 그런데 이 집마저 김연필이 세상을 뜬 직후인 1933년 다시 둘로 쪼개졌다. 이번에는 김영숙과 그 아들인 김문경이 154-1번지를 지분 분할하여 매도한 것이다. 결국 154-1번지는 다시 154-5와 154-6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과의 갈등이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 내막은 확인할 가능성이 없다. 한편 김연필이 분할 매도한 154-2번지는 뒤에 154-3과 154-4로 다시 분할되었고, 154-4는 다시 154-7, 154-8, 154-9, 154-10 등으로 분할되어 자잘한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154-10번지의 작은 한옥이 바로 이 중의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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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문학과 예술을 기리는 뜻으로 <제비다방>이 다시 문을 열었다. 통인동 154-10번지 열평 남짓한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이 새로운 공간은 그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고 알차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문화유산신탁과 재답법인 아름지기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나마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작은 공간이 과연 어떤 역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자리를 더욱 넓혀서 여기에 제대로 된 이상 기념관을 세우고 이상의 성장기의 요람이었던 옛집도 제대로 복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촌의 주민들도 이런 계획이라면 흔쾌히 동조할 것으로 믿는다.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주민들을 설득하면서 발전적인 대안을 만든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상의 집이 살아나고 통인동을 비롯한 서촌 마을도 함께 살아나 문화의 향기가 풍기는 서울의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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