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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주변/권영민의 문단시평

소설가 김지원씨가 마지막 남긴 장편 시극 「국경의 밤」

재미 소설가 김지원씨가 세상을 떠났다. 김지원씨는 오랜 동안 미국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 아버지인 시인 김동환과 어머니인 소설가 최정희 사이에서 태어났고, 동생인 김채원(소설가)과 함께 문학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1997년 소설 <사랑의 예감>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지원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집필했던 마지막 작품이 장편 시극 국경의 밤이다. 이 작품은 두 해 전에 김지원씨가 암 투병을 하면서 펜으로 썼던 것으로 문학사상에 소개된 바 있다. 아버지 김동환이 1925년 발표한 서사적 장시 국경의 밤을 시극의 형태로 고쳐쓴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후 그 종적을 알 수 없는 아버지 김동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이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시극 국경의 밤은 모두 4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이야기는 원작인 국경의 밤의 서사적 전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극중의 이야기는 한반도와 만주가 접해 있는 두만강변의 작은 마을을 시적 배경으로 하여 여주인공의 사랑과 그 갈등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 사랑 이야기의 배경에는 북국의 겨울밤이 주는 암울한 분위기가 강조됨으로써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던 당대 민중의 고통과 불안이 잘 암시되고 있다. 김지원씨는 원작의 전편에 흐르던 정서의 진폭을 극적 갈등과 긴장의 상황으로 변화시켜 차원 높은 시극으로 발전시켜 놓는다. 이러한 변화는 여주인공과 그녀를 중심으로 하여 갈등하는 두 남성의 극적 설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물론 김지원씨는 여주인공이 두 사내의 중간에서 겪게 되는 삶의 고된 역정을 원작과 마찬가지로 강조한다. 이 시극은 원작의 시적 진술에서 드러나는 어조의 단일성을 등장인물의 극적 대화로 바꿈으로써 변화와 긴장을 살린다. 그리고 극중에 해설자를 등장시켜 극의 전개 양상을 돕는다든지 인물의 대화를 시 작품의 진술 내용에서 그대로 옮겨 온다든지 하여 시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낸다. 특히 전체 3부로 나누어져 있던 장시 국경의 밤에서 제3부를 3막과 4막으로 구분하여 놓음으로써 극적 장면 연출과 이야기의 전환을 용이하게 만든 것은 주목을 요한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의 전체 내용을 김지원씨의 시극의 구성에 비추어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원작 국경의 밤은 전체 37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경의 밤의 제1(127)는 추운 겨울 눈 속에서 소금 밀수꾼 남편이 두만강을 건너 간 후, 남편의 안전을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여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보여준다. 이 같은 시적 정황은 빛과 소리로 구체화된 감각적인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더욱 뚜렷한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이 여주인공에게 한 사내가 찾아온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던 이 청년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 시에서 노래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가 분명하게 제시된다. 김지원씨의 시극 제1막에서 이 장면들이 그대로 재현된다.

2(2857)는 회상적 과거가 서사시의 화폭을 장식한다. 여주인공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첫사랑이었던 청년 등의 과거 이야기가 회상의 형식을 빌려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여주인공의 신분과 내력이 밝혀진다. 여진족의 후예이면서 재가승(在家僧)의 딸이었던 여주인공이 청년과 만나 서로 사랑하였던 옛 추억도 살아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헤어져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도 펼쳐진다. 이러한 시적 진술을 통해 사랑의 기쁨과 그 아름다움이 이별의 고통으로 바뀌는 과정 자체가 밀도 있게 그려지고 있으며, 정서적 균형도 유지되고 있다. 김지원씨의 시극에서는 제2막에 해당한다. 무대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으며 극적 갈등이 고조된다.

국경의 밤에서 가장 격렬한 정서적 충동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제3(5872)이다. 이 부분에 이르러 긴장은 고조되고 격렬한 사랑의 감정이 시적 정서의 충일 상태로 뒤바뀐다. 여주인공을 찾아온 청년은 그녀에게 사랑의 결합을 호소하지만, 여주인공은 끝내 이 청년의 사랑을 거절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강을 건넜던 남편이 마적의 총에 희생되어 주검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말에 이르기 때문에, 비극적이 사랑의 이야기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열려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여주인공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인습에 얽혀있던 결혼 생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김지원씨의 시극에서 제3막과 제4막으로 구분되고 있다.

원작인 국경의 밤은 서사적 화폭을 그려내는 언어 표현의 변화와 활달한 수사적 기교가 뛰어나다. 전체적인 시적 어조를 통제하며 시적 형식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는 리듬 의식도 정서의 기복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김지원씨는 이러한 요소들이 서사적 장시로서의 양식적 속성을 유지하는 데에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시극에서 이것들을 재편하면서 시적 어조의 극적 전환에 힘을 기울였다. 김지원씨의 문학을 다시 돌아보기 위해 이 시극이 무대에 올릴 날을 기다려본다. 김지원씨의 명복을 빈다. (2013.2,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