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구한말에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조선 시대의 고서 한 권을 들고 왔던 일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당장 프랑스에 있는 그 귀중한 고문서들을 모두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흥분했었다. 그 후 숱한 곡절을 거친 끝에 결국은 ‘영구대여’라는 형식을 빌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의궤를 비롯한 고문서를 모두 되찾아 왔다. 다행한 일이다. 해외로 흘러나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들이 많지만, 정부가 나서서 그것들을 다시 국내로 찾아 들여온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 문화재들이 외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도 이제는 한번 돌아보아야 하고,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그 귀환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야 한다.
미국 버클리대학에 동양학 귀중 도서 문고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 도서 가운데 「아사미 문고」가 유명하다. 「아사미 문고」는 한국의 희귀한 고서 수천 권을 모아 놓은 것으로, 미국 내의 동양학 관계 문고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어느 사대부 집안의 사랑방에서 소중하게 보관했어야 할 그 많은 책들이 ‘아사미’라는 일본 사람의 성을 따라 한데 묶여진 사연이 기가 막히다.
아사미 린따로(淺見倫太郞)는 동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일본의 이름난 변호사이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구한말의 격변기부터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 조약을 체결한 후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의 외교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통감부의 법률 고문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제 강점 이후에는 총독부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아사미 린따로는 한국에 들어온 후부터 한국의 고문서와 전적에 관심을 두고 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고서들을 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것은 헐값으로 사기도 했겠지만, 어떤 것은 반강제적으로 빼앗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권세를 빌기 위해 자기 집의 문건들을 거져 내다준 못난 조선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법률 제도에 관심을 두어 한국의 법제도에 관한 고문서와 전적들을 모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고서들을 자료 삼아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1943년에 세상을 떠난 뒤, 이 고문서들은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아사미 린따로의 후손들이 2차대전 직후에 미국인에게 모든 고문서와 전적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다. 이 고문서들은 1950년 미국으로 건너 왔고, 버클리 대학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문고의 명칭도 일본인 아사미의 성을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사미 문고」에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한국의 전통적인 법제도에 관한 서적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경전들의 언해본과 수많은 문집도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판본도 적지 않다. 고전문학 자료 가운데에는, 조선 시대 영조 때 사도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유명한 <한중록(閑中錄)> 필사본은 그 내용과 필체가 진본에 가깝다. 영조 때의 가객 김수장이 엮은 시조집 <해동 가요(海東歌謠)>의 궁체 필사본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최선본(最善本)으로 보존되어 있다. 고전소설의 백미로 알려져 있는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한문 목판본이 있는데, 두 작품의 한문본은 아사미 문고본이 가장 대표적인 판본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고서들의 보존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못된다. 한지로 만들어진 우리의 고서들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눕혀 놓아야만 오래 보존할 수 있다. 아사미문고의 모든 책들은 낙질을 방지하기 위해 서투(書套)를 만들어 싸두고 있지만, 철제 책장에 꽂아 세워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서배(書背)가 뒤틀려서 오래 보존하기 어렵다.
아사미 문고의 한국 고문서와 전적들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미국인 학자들이 별로 없다. 이 고서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사미 문고를 관리하는 사서들은 어쩌다가 한국에서 찾아온 특별한 손님이 있으면 한 번씩 철장 문을 열어 서고를 보여줄 뿐이다. 일 년 내내 이 문고의 서적을 열람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귀중한 문헌들이 철문 속에 갇혀 세월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한때의 불행한 역사로 인해 지금 엉뚱한 임자의 손에 넘어와 제대로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고서들을 모두 다시 한국으로 옮겨오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고 우리 조상들의 것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권한마저 없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이것이 역사의 탓인가, 우리 자신의 잘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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