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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의 첫 시집 『목숨』이 간행된 지 60년이 되었다. 여기 60년이라는 시간에는 단순한 개인적 의미로 덮어둘 수 없는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시집은 전란 중에 시작 활동에 나선 시인의 초기 작품 26편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시적 주제와 방법이 한국 전후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하다. 표제작인 <목숨>에서 시인은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 그래도 죽지만 않는 /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라고 토로함으로써,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생명에의 기도를 일찍부터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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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숨』은 해방 이후 등단한 여성 시인의 첫 시집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전쟁을 겪던 당시 시단에는 식민지 시대에 등단한 노천명, 모윤숙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 문단적 존재를 인정할 만한 새로운 세대의 여성 시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인 김남조의 등장과 시집 『목숨』의 출간은 한국의 여성 시단에 해방 세대의 등장을 말해준다. 이 시집이 출간된 시기는 한국전쟁이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잠정적인 수습 단계로 접어들던 때였고, 한국 민족 전체의 생존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시대였다.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과 절규가 들끓고 있는 동안, 문단에서도 전후 현실의 혼란을 두고 비탄의 한숨과 자조의 넋두리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충격적인 전쟁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거나, 그 비극성을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문제로 끌어올릴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전후 시단의 경우에는 전후적 징후라고 말할 수 있는 미묘한 정서적 충동이 여러 가지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 전후시의 문학적 성격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새로운 시인들의 등장과 함께 더욱 폭넓은 시단의 형성을 보게 된 점이 주목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재편성된 시단에는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시적 지향을 새롭게 조정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해방 직후의 이데올로기의 시련과 전쟁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순수성과 서정성에 복귀하고 있다. 이들이 시적 이념이나 사회의식을 외면한 것은 자기 내면에서의 갈등과 극복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그 대세를 그대로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후의 문단에 새로이 등장한 시인들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시적 세계의 확대를 꾀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 어떤 시인들은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를 더욱 넓히고자 노력하며, 어떤 시인들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시 정신의 구현에 몰두하기도 한다. 폐허가 되어버린 전후의 현실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으로 고통의 삶을 안위할 수 있었던 이들 새로운 세대의 시인을 ‘전후파’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이들의 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한 시대의 정신적 징후를 김남조의 시집 『목숨』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전후파 시인들의 면모를 가장 포괄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은 <한국전후문제시집>(1961)이다. 이 책에는 박인환, 고원, 고은, 구상, 구자운, 김관식, 김광림, 김남조, 김수영, 김윤성, 김종문, 김종삼, 김춘수, 민재식, 박봉우, 박성룡, 박양균, 박재삼, 박태진, 박희진, 성찬경, 신동문, 신동집, 유정, 이동주, 이원섭, 이형기, 전봉건, 전영경, 정한모, 조병화, 조향, 황금찬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이외에도 구경서, 김규동, 김구용, 김요섭, 홍윤숙, 한성기 등이 모두 같은 시대에 자리 잡고 있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1950년대는 시의 시대를 구가할 정도로 다양한 시적 경향을 포괄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있어서 시적 서정성과 그 실험 정신이 균형을 이루게 된 것이 ‘전후파’ 시인들의 시적 성과이지만 그 출발점에 김남조의 시집 『목숨』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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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숨』은 시인 김남조의 시적 세계의 원점에 해당한다. 생명의 구원과 사랑을 위한 기도는 시인 김남조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주제로 자리잡는다. 전후파 시인들의 시 정신과 시적 방법은 인간 존재와 그 삶에 관한 본질적인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시의 전반적인 경향은 시적 정서를 주축으로 하는 경우와 시적 인식을 주축으로 하는 경우로 대별된다. 전자의 경우는 흔히 ‘전통파’ 또는 ‘서정파’라는 말로 지칭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시적 언어와 형태에 새로운 실험을 감행하면서 서정적 전통의 변혁에 주력해 온 시인들과, 사회적 인식과 현실 문제를 시 속에 포괄함으로써 적극적인 시 정신의 구현에 힘쓴 시인들로 다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언어파’ 또는 ‘실험파’와 ‘현실파’로 지칭된다. ‘언어파’의 시인들은 시적 인식을 중시함으로써 시어의 효과를 겨냥한다. 이들은 흔히 후기 모더니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적 성과를 평가받고 있는데, 특히 한국어에 현대적 감각을 부여하고 시적 형태에 대한 모색을 가능케 하였다. ‘현실파’의 경우에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풍자적 접근이 시를 통해 가능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조와 비판이 함께 드러나는 이들의 시에서 시적 의지의 문제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후 시단의 경향 속에서 시인 김남조는 시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회적 현실 문제를 개인적인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삶의 현실보다는 생명의 본질을, 역사적 조건보다는 존재의 가치를 더욱 깊이 있는 시적 주제로 해석해 낸다. 한국 현대시에서 정서의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동시에 포괄하여 형상화해낸 시인은 김남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남조 시의 정신적 거점에 해당하는 시집 『목숨』의 문학사적 의미가 다시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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