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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백철(白鐵)과 일본 동경의 《지상낙원(地上樂園》시대

비평가 백철(1908-1985)의 동경 시대는 1927년부터 시작된다. 그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 바로 그해이며, 그때부터 그의 문학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동경고등사범 2학년 때부터 시인을 꿈꾸며 시 전문지 시신(詩神)을 구독하고 학교에서 간행하는 교우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시가 일본인 문학도들의 눈에 띄게 되면서 처음 대면하게 된 일본 동경의 문단 풍경은 백철의 자서전 진리와 현실(박영사, 1975)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시라가와[白川 *백철의 동경고사 동창생]의 안내로 민중 시인이라고 이름한 시라도리 쇼오고[白鳥省吾]의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1929년 백철이 동경 고사 3학년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시라도리 쇼오고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이라는 시지(詩誌)를 동인제로 간행하고 있었다. 시라도리는 그때 후꾸다(福田正夫) 등과 함께 휘트먼의 시풍을 따라 일본의 민중시파를 이끄는 권위같이 알려져 있었고, 저널리즘에선 한물 가버린 인상을 주는 기성파의 한 사람이었다. 시라가와는 전부터 시라도리 쇼오고씨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조선 출신의 젊은 문학 재사라고 추천 소개했다. 그때, 시라도리 쇼오고씨는 내개 김소운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씨가 한때 지상낙원의 동인이었다는 말과 일본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찾아간 날로부터 지상낙원의 동인이 되었고, 그 동인의 자격으로 시편을 동시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인 중엔 치바현[千葉縣] 출신으로 미즈하라[水原 * 백철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이 시인은 이름은 잘못된 것임. 市原이라는 이름임을 시 작품 <송림 松林>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음]라는 교원 시인이 있어서 나와 가깝게 사귀게 되어 치바 현으로 놀러간 일도 있는데, 치바 시 근방의 임업 시험장에서 취재한 <삼림(森林)> (* 이 작품의 제목은 송림으로 되어 있는데, 백철이 잘못 기억하고 있다. 19306월에 발표하였다.)이란 내 시편이 평판작이 되었다. 하늘을 뻗치듯이 자라나는 신록의 수림에다가 야망에 찬 청춘의 정렬적인 이미지를 오버랩시켰던 것이다. 발표된 동인의 시편들에 대한 월평적인 시평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내가 지상낙원에 동인으로 머문 것은 약 일년간, 차츰 이 지상낙원파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 모인 시인들은 대개가 농촌 자연을 따르는 전원파로서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시풍이 낡아빠진 것을 감촉하게 되었을 뿐더러 내가 개인적으로 더 그들을 경멸하게 된 동기는 동인회 같은 것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생활과 시에 대한 태도나 취미가 한인적(閑人的)인 안이성의 것으로 도무지 진지한 경건성을 느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예를 들면, 모임 뒤에 회식 같은 것을 할 때만 해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진취적인 진지한 것이 없고, 마치 일본인의 만자이[漫才]와 같이 재담을 경쟁하는 것같은 이야기들이 내 비위에 거슬라고 구역질나는 기분이었다. 아마 이것은 이때 벌써 나는 그 시대 풍조인 마르크시즘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증거의 반영일는지 몰랐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고사 3학년, 그러니까 1929년 경부터 나는 어느 새 마르크시즘의 근처를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교내에서 열리는 R.S라는 데도 가 앉아보고, 자본론같은 것도 뒤쳐보고, 그들의 사회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그쪽에서 동정하는 좌익파의 급우들과도 접촉하는 일이 많게 되었다. 조선 사람과 같이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로서 먼저 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의 인간적 태도였다. 그들에겐 민족적인 차별 의식이 전혀 없고 동등한 종지의 입장으로서 대해오는 그 태도에 친근미가 느껴졌다. 오직 도오시[同志]’라는 말이 그들의 계급적인 단결을 약속하는 평등의 호칭이었는데 이런 것들은 내게다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였다. (140-142)

 

백철이 처음으로 만났던 일본 동경의 문단 풍경은 앞의 인용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학생 신분으로 백철이 처음 발을 내딛게 된 동경 문단의 지상낙원은 무엇인가?

일본 근대문학관에서 펴낸 일본근대문학대사전을 보면, 지상낙원에 대해 다음은 내용의 해설이 붙어 있다. 지상낙원은 시 전문지로서, 동경 대지사(大地舍)에서 1926(대정15) 6월에 창간되었다. 1938(소화 13) 4월에 통권 87호로 종간되었다. 시라도리 쇼오고가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국정순일(國井淳一),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 등이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민요의 창작과 보급에 힘썼으며, 지방 문화 의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 잡지를 주간한 시라도리 쇼오고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1914년 경부터 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시에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국가 권력에 대결하여 이를 비판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민중시 운동의 적극적인 실천가로서 소박한 정서를 바탕으로하는 평이하고도 주조가 분명한 시들을 발표하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시집 대지의 사랑, 공생의 깃발, 낙원의 도상등을 내었다.

백철이 시 전문지 지상낙원에서 활동한 것은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일년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잡지에서의 창작 활동을 기반으로 백철은 곧바로 동경에서 전위시인일본프롤레타리아시인회등의 좌익 문단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상낙원시절의 백철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동경의 일본근대문학관에 보관 중인 시 잡지 지상낙원을 보면, 백철이 여기에 발표한 작품은 시 9, 비평 2편이다. 작품들의 서지 사항을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시 작품 목록>

った(우박이 내리던 날), (411, 1929, 11)

(누이여), (412, 1929, 12)

彼等だつて......(그들 또한 ......), (51, 1930, 1)

追悼(추도) (53, 1930, 3)

隅田川, 夕陽(스미다가와, 석양) (54, 1930, 4)

Xされた仲間( X당한 동무에게) (55, 1930, 5)

鷗群(해오라기 떼) (55, 1930, 5)

Xはれた同志 (봄과 X당한 동지) (56, 1930, 6)

松林(송림) (56, 1930, 6)

 

<평론 목록>

プロレタリア現實問題について(프롤레타리아시의 현실문제에 관하여) (55, 1930, 5)

プロレタリア詩論具體的 檢討(프롤레타리아시론의 구체적 검토) (56, 1930, 6)

 

백철이 지상낙원시대에 발표한 시 작품들은 모두 격렬한 투쟁적인 구호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궁핍한 재난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삶의 참상을 시 <우박이 내리던 날>에서 그들은 이렇게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빼앗길 것은 이것저것 모두 줘버리면 된다./가엾게도 그들이 자작농이나 소지주를/꿈꿔온 작은 희망은 이젠 사라지고,/말없이 쓰러져있는 벼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다./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나는 그것이 답답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노동자로 전락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오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초를 그려 놓은 시 <그들 또한>에서 몇번이고 베어도 묵묵히 자라나는 잡초처럼/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현해탄을 넘고 있다./그것이 지금에는/가는 곳곳의 길가에 보이는 잡초처럼/일본의 어느 시골에서도 여기저기/때 묻은 흰옷이 눈에 띈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백철의 현실 인식은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의 입장으로서는 유별난 것이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한 반발을 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백철의 현실 비판 의식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는 것은 <추도><스미다가와, 석양> 등의 시에서 암시하고 있는 노동자의 단합된 힘을 추구하는 정신에서 찾아진다. 노동 운동을 선도하다가 체포되어 죽음을 맞게된 동료의 희생을 추모하는 <추도>의 경우, 단결과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보여주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고통이 어린 스미다가와 강물을 바라보면서, “모두다 여기 와 보라./어느 곳에 과연 평화가 있는가./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는가!/이처럼 수면이 두꺼운 원한의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도,/모두, 가난한 이들의 죄라 할 것인가.”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러한 절규는 <X당한 동무에게>에서 작업 중 고장난 기계의 철판을 맞고 죽어간 노동자의 희생을 놓고 분개하는 장면에서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이 비극의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노동자의 단결과 복수의 의지를 강지한다.

백철의 시 가운데 고양된 의식의 시적 형상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갈매기떼><송림>을 들 수 있다. 바닷가에 몰려드는 갈매기떼를 노동자의 무리로 환치시키고, 서녘 하늘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에 물드는 대지를 보며,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청년 백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 <송림>의 경우는 이미 앞에 인용한 자서전에서 당시에 평판작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거니와,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 견고하게 서로 어깨를 나누면서 곧게 자라는 나무를 보며, 전진하는 노동자들의 강인한 투쟁 의지를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백철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시문학사상에서 보기 드믄 사례에 해당한다. 우선, 이 작품들이 1929, 30년에 동경에서 발표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일본 동경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가 존재하였으며, 그들이 <무산자>사를 설립하고 이를 근거로 조선공산당의 재건 운동을 꾀했던 것이다. 백철은 이들 조선인 프로 문단과는 관계없이 일본 문단에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극렬한 투쟁적인 저항시를 일본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작활동을 통하여 그는 다시 좌파 시동인지인 전위시인에 가담하였고, 다시 일본프롤레타리아시인회의 중요 구성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학인들이 일본어로 쓴 작품들이 대부분 친일적인 경향에 빠져들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백철의 시작품들은 일본어를 바탕으로 성립된 식민지 문화에 대한 색다른 문화적인 도전에 해당하는 셈이다.

백철은 지상낙원에 두 편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형식 문제이다. 그가 1930년 이후 전위시인프롤레타리아시등의 잡지에 이른바 슈프레히콜이라고 명명된 집단 낭창시의 형태를 처음으로 소개하여 일본 프로 시단에 정착시켰던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는 지상낙원시대부터 프로시의 형식 문제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가 발표한 두 편의 평론이 모두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백철은 프롤레타리아 시의 현재 문제를 제재의 탐구와 형식의 탐구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검토하고 있다. 그는 프로 시에서 제재의 탐구는 당면한 현실 운동에 기초할 것을 주장한다. 1928, 1929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대검거 이후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침체에 빠져 있는데, 과거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시가 새로운 운동의 전개 방향에서 하나의 무기가 될 필요가 있음을 주목하면서,특히 자본가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한 스트라이크시를 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프로 시의 형식은 자유시의 비대중성을 극복하고 노동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백철의 견해다. 백철은 노동 대중의 생활 감각을 살릴 수 있는 음악성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백철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시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새로운 시형식의 창조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 일본 문단의 일각에서 제기된, 프로시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민요시의 차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대해 백철은 생활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우선 문제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프로 서사시에 대해서도 공장과 기계를 상대로 하는 무산 대중의 생활감각이 과연 과거 서사시의 집단적 정서와 같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무산 대중의 생활 감정을 살려낼 수 있는 새로운 힘있는 서정시의 구현이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백철은 1931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당연시되었던 일본 중학교 교사 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은 선택한다. 그것이 바로 국내 문단으로의 진출이다. 3년 동안 투쟁적인 시인으로서 쌓아올린 동경 문단의 경력을 안고 1930년대의 우리 문단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졸업 후 귀국을 늦춘 그가 동경의 하숙에서 탈고한 야심적인 평론 <농민문학 문제>가 조선일보에 발표된것은 193110월이며, 그의 새로운 문학적 인생도 이 평론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지상낙원에 발표된 백철 시 작품은 모두 일본 동경의 <일본 근대문학관>의 도움을 얻어 찾아내었다. <일본근대문학관>의 관계자께 고마음을 표한다. 그 가운데 두 편을 초역하여 여기 소개한다.

 

<우박이 내리던 날>

구름 구름 구름 구름

무수한 구름떼가 대군처럼 밀려간다.

……

굉장한 구름이군!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제기럴, 또 내리려누나,

내리는 것도 좋지만, 우리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다.

 

얼마전 그 홍수의 광경이

여윈 형의 옆얼굴에 창백하게 비쳤다.

큰비! 홍수!

다리가 떠나가고 가옥이 뒤집히고

가엾은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거친 물살 속으로 휩쓸려들어간다.

그리고, 논밭은 물에 잠기고 벼는 모두 썩어버렸다.

 

오늘밤도 또 그럴까?

나는 불안하게 형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번개가 지하의 다이나마이트처럼 꽝하고 울렸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르듯 우르르꽝하고 울려오는

천둥!

우리는 모두 함께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뜰로 뛰어내려갔을 때

불가사의한 하얀 포탄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소녀가 용감히 폭탄을 맞았던 것처럼,

어머니는 마을을 구하려는 생각에 그 불가사의한 우박을 입에 집어넣었다.

-조선의 전설에

(그것은 나의 먼 어린 시절 어느 날의 기억 속에 있었다.)

내리기 시작하는 우박을 부인이

주워먹으면 갑자기 멎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게 멈춰설 것이 아니였다.

순간순간 세력은 커져갈 뿐이다.

1, 2, 30

- 그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였을까.

제기럴! 멋대로 쏟아져라

형이 투덜거리자 곧 우박이 멈췄다.

그런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딱 멎어 버렸다.

서쪽으로는 어처구니없게도 푸른 하늘까지도 보였다.

벌써 농작물은 다 휩쓸려 버렸다

형의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문앞으로 두세명의 젊은 농부들이 격분한 어조로 무언가 떠들어대며 지나갔다.

우리들도 어떤 무서운 예감에 휩싸여

그들의 뒤를 따라 들로 나갔다.

겨우 30!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 버렸다.

오늘 점심때 까지만 해도 솩솩, 파도치던 논과 밭이였는데,

벼잎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쓰러져 있었다.

단지, 퍼어런 벼 줄기만이 보기 흉하게 쓰러져 있을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수리가 정돈 되지 않은

이 농촌.

옛 원시인들이 하던 그대로의 경작법으로,

어제는 내려쬐는 햇볕으로 가뭄이 들고, 오늘은 홍수로 떠들썩해 있는 그들

단 하루만이라도 편안한 밤을 맞이해 본 날은 없다.

그래도 살아가는데 이 길밖에 없다고 여기는 그들은

몇번이고 몇번이고 삽과 괭이를 다시 든다.

그처럼 힘들이고 고생하여 겨우 키워논 작물들이었거늘.

오늘은 또 이와같은 뜻하지 않은 재난이 엄습해 왔다.

아아- 말끔히 걷혀진 저녁 하늘

그들은 이렇게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

빼앗길 것은 이것저것 모두 줘버리면 된다.

가엾게도 그들이 자작농이나 소지주를

꿈꿔온 작은 희망은 이젠 사라지고,

말없이 쓰러져있는 벼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답답하다. (1929.11. pp. 38-39)

 

<누이여>

누이여.

아니, 아름다운 한 사람 소지주의 따님이여.

너는 잘도 그런 건방진 말을 할 수가 있었구나.

그 소작인의 딸들은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마치 우리들과는 종자가 틀린

돼지새끼들처럼

일생, 한번도 씻어 본 일이 없는 듯한 흙투성이의 얼굴

누덕누덕 기어입은 옷.

그런데다 특유의 악취까지 풍기는

저는 그녀들 근처에 가는 것조차 싫어요.

그러기에 저는 미친듯이 소작인들을 위해 일하는 오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요……라고.

누이여,

네가 하는 말은 정말이다. 아니 사실이다.

그러나 누이여,

네게 그런 경멸의 마음을 갖게 할 정도로 그녀들을 천하게 만든 놈은 누구인가.

돼지새끼로까지 그녀들을 타락하게 만든 것은 어느놈인가.

그녀들로부터 입을 것 먹을 것을 빼앗은 자들은 어디의 어느놈인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너 또한 그 중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정도로 너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네게 그 화려한 옷과 네 소중한 화장품을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저 안락의자에서 잠들고 있는 너의 부친이나 그외의 자본가들은 단 한번이라도 삽이나 괭이를 쥐어 본 일이 있는가.

그녀들은 영하 20도의 겨울이라 해도 불타오르는 듯한 여름이라 해도,

단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시간을 갖지 못한다.

첫새벽 5시부터 일어나 발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분주히 일하는 그녀들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밥조차 먹지 못하는 그녀들이 아닌가.

새로 베옷 한벌 만들지 못하게 지주들이 전부 거두어 간다.

그런데-

너는 지주의 딸이라 하여

매일-

아침에는 마음껏 늦잠을 잘 수 있고,

끼니 때마다 달고 맛있는 것을 실컷 먹을 수 있고,

하루에 몇 번이고 아름다움에 실증날 정도로 화장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한 생활이련만)

이것이 너의 자랑스런 생활 모습이다.

 

누이여

이래도, 너는 나의 일하는 마음을

모르노라 하겠는가.

너는 너와 너의 벗들만이 깨끗한 인종이라고 정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소작인의 딸들에게도 너의 화려한 옷과 화장품을 주어보렴.

분명히 너 이상으로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돼지 새끼들 같은 그녀들을 너 이상의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너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누이여,

너는 이러한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노라 할 수 있겠는가. (1929.12. 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