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해방 1주년을 맞는 우리 문단에서 광복의 열정을 실감 있게 보여주는 한 권의 시집이 출간된다.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공동시집 <청록집>이 바로 그것이다. 문단의 좌우 대립과 이데올로기의 요구가 결렬했던 해방 공간에 등장한 <청록집>이라는 작은 시집은 경이로움 그 자체에 해당한다. 문학의 정치시대라고 말 할 수 있는 해방 공간에서 우파 문단을 주도했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이 시집을 해방 1주년을 맞는 기념출판물로 내세운 바 있다.
<청록집>은 각기 다른 시적 개성을 보여주었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이라는 세 시인의 초기 시들을 묶은 것이지만, 한국 현대시에서 ‘자연의 발견’이라는 명제가 가장 적절하게 시적 형상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그 의미가 규정된다. 그리고 1930년대 말기의 시와 해방 이후의 시를 잇는 서정시의 맥락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문학사의 위치가 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순수시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서정적 자아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이들이 발견한 <자연>이라는 것에서 내면적 역동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된 적도 있지만, 박목월의 언어 감각과 토속성, 박두진의 시적 의지와 이데아 지향, 그리고 조지훈의 고전적 정신 등은 우리 시단에 폭넓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청록집>의 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적인 정서가 삶의 현실의 여러 문제를 폭 넓게 수용하게 되는 과정은 <청록집> 이후 세 시인의 시 세계의 확대과정을 통해 확인된다.
박두진은 <오도(午禱)>(1953)에서부터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수석열전(水石列傳)>(1973) 등 수많은 시집을 내놓으면서 반복적인 율조와 절창의 언어를 통해 자기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하기도 하고,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노래하기도 한다. <산아. 우뚝 솟은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청산도 靑山道)에서 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읊어지는 박두진의 시들은 존재의 심연을 헤매는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명에의 경외감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정서적 갈등의 내면화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박두진이 노래하고 있는 자연은 자아와의 일치를 보이기 때문에, 시적 긴장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친화력에 의해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고 있으며, 거기서 오는 영원한 생명력이 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박목월은 <산도화>(1954)를 비롯하여 <난(蘭)․기타>(1959)에서 <경상도 가랑잎>(1968)에 이르기까지 고유의 정서와 리리시즘을 섬세한 감각으로 재현하면서, 일상의 현실과 삶의 체험을 자신의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시인 박목월이 순수한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현실로 그의 시선을 돌리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과 거기에 깃들인 인정미이다. 예컨대 「오늘 나의 밥상에는 / 냉이국 한그릇. / 풋나물무침에 / 新苔. / 미나리김치. /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祝祿을. / 黙禱를 드리고 / 젓가락을 잡으니 / 혀에 그득한 /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소찬(素饌)」)와 같은 싯구에서 그는 애환이 담긴 삶이지만 소탈한 일상에 만족한다. 특히 그는 초기 시에서와 같이 자연이라는 시적 대상을 관조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현실에 자리 잡고 그 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는 인간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박목월은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의 체험영역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초기시의 감각적 단순성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변모를 놓고 박목월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리리시즘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목월은 일상의 체험을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을 초극하기 위한 의지를 노래하지 않는다. 자기 정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삶의 애환을 포괄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내세우는 법이 없이, 천품의 가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일상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조지훈은 <풀잎 단장>(1952) 이후 <조지훈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등의 시집으로 시적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 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한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기도 하지만, 조지훈은 변화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그리고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킬 뿐이다. 조지훈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목소리, 그것은 그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를 고정시켜 놓고 있는 징표임이 분명하다.
<청록집>은 해방 시단에서 가장 커다란 주제로 부각되었던 정치시의 가능성을 시적 실천을 통해 거부했던 역사적 성과로 자리한다. 되찾은 모국어의 감각과 기법을 실험하면서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던 <청록집>의 시인들의 노력은 혼란의 해방 공간을 벗어난 후 지금까지도 이들을 따르는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다양한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시가 민족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생성되는 영혼의 노래이며, 그 자체의 언어와 형식도 시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갱신해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은 <청록집> 이후 60년의 한국 시단을 돌아보는 모든 문학인들에게는 새삼스런 감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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