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중반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문학잡지《탐구(探求)》(1936. 5)에 발표된 주영섭(朱永涉)의 시 「바˙노바」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영섭은 평양 태생으로 평양 광성(光成)고보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 문학부에서 수학한 바 있다. 보성전문 재학중 학생회연극부를 만들어 고리키의 「밤 주막」을 공연하였고, 카프 산하 극단 「신건설(新建設)」의 제1회 공연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1933)에 찬조 출연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동경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운동을 주도하면서 1934년 마완영(馬完英)·이진순(李眞淳)·박동근(朴東根)·김영화(金永華)와 더불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단하고 기관지 《막(幕)》의 발간하였다. 1935년 일본에서 창간된 문예 동인지 《창작(創作)》 창간호에 시 「포도밭」을 발표하였고, 2호에 「세레나데」「해가오리」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에서의 신극의 확립을 창작극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935년 6월 4일 동경의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유치진(柳致眞)의 「소」와 함께 자신의 창작 희곡 「나루」(단막극)를 공연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그리고 신백수, 이시우 등이 중심이 되었던 《삼사문학》에도 동인으로 참여하여 제5호(1936. 10)에 시 「거리의 풍경」「달밤」 등의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주영섭이 동경에서 참여한 동인지 《탐구》는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1930년대의 한국문단은 수많은 문학 동인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소잡지(小雜誌)’가 출현함으로써 그 새로운 문학적 충동과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시문학(詩文學)》이나 《시인부락(詩人部落)》처럼 문학사의 주류 속에서 그 위상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가 문단의 주변에서 그 존재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사라진 것들이 많다. 잡지 《탐구》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탐구》는 ‘문학계간’이라는 부제를 달고 1936년 5월 20일 그 창간호가 나왔다. 이 잡지를 발행한 ‘탐구사(探求社)’는 경성 수송정 123번지이며 발행인은 이용우(李龍雨)로 표시되어 있다. 잡지의 후기에 창간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데, 잡지 내용을 소개하는 간략한 몇 구절 끝에‘이십대 청년들의 일원적인 열정을 사주기 바란다.’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띈다. 발행인 이용우는 창간호에 소설 「외투」를 발표하고 있으니 아마도 동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이는데, 그의 행적은 달리 더 확인할 길이 없다. 창간호에는 이용우의 「외투」 외에도 신백수(申百秀)의 「무대장치」와 최인준(崔仁俊)의 「이뿐이의 서름」이라는 소설이 실려 있다. 그리고 주영섭의 「바˙노바」와 정병호(鄭炳鎬)의 「의욕」이라는 시도 읽을 수 있다. 이시우(李時雨)의 평론 「비판의 심리」와 한태천(韓泰泉)의 희곡 「산월(山月)이」도 있다. 시와 소설, 희곡과 평론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표지의 장정은 정현웅(鄭玄雄)이 맡았다. 백 페이지에 미치지 못하는 이 작은 잡지의 집필진은 당시 일본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1934년 가을에 창간호를 내었던 동인지《삼사문학 (三四文學)》의 신백수, 이시우, 정현웅 등이 모두 《탐구》의 창간에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잡지는 1936년 7월 제2호가 전체 32면의 초라한 모습으로 간행된 후 폐간되었는데, 창간호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필진에서 빠졌다.
주영섭의 시 「바˙노바」를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불 꺼진 람프와 싸모왈-ㄹ
競馬場本柵 같은 교자.
실겅우에몽켜섯는 술병 - 世界選手들
마음에맞는 술병을골라
「챤봉」을마시고
베레- 氏
루바-슈카 君
마르세에유를부르고
아리랑을노래하자.
재주꾼인 마스터가
와인그라-스에비라미트를쌋는다
갖들어온「체리꼬」가
헛드리는아브상에 파-란불이붓는다
샴팡병과나무걸상
배-커스와 비-너스의肖像,
獨逸말하는 大學生이여
원카마시는 詩人이여
잠자쿠잇는 「고루뎅」바지여
제각기色다른술을붓고
다가치 祝杯를들자!
낡은성냥갑을버려라,
한 대남은담배를피여물고
세시넘은 노-바를나서자.
이 시를 새삼스럽게 다시 넘겨보는 이유는 1930년대 전환기에 접어들게 된 한국문단의 새로운 경향과 이 시의 감각이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당시 동경 유학생들의 내면풍경이 특이한 문제성을 띈 채 이 시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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