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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한용운의 일본 시절 한시

한용운의 일본 시절이라는 표제는 그의 행적과 서로 부합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용운의 일생이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데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이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일본에 체류했던 것은 일년이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결행된 일본행에 대하여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반도 안에 국척하여 있는 것이 어쩐지 사내의 본의가 아닌 듯하여 일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는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하여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비단 불교문화 뿐 아니라 새 시대 기운이 융흥한다 전하는 일본의 자태를 보고 싶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관(馬關)에 내리어 동경에 가서 조동종(曹洞宗)의 통치기관인 종무원을 찾아 그곳 홍진설삼(弘眞雪三)이라는 일본의 고승과 계합이 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호의로 학비 일푼 없는 몸이나 조동종대학(曹洞宗大學)에 입학하여 일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 그럴 때에 조선에서 최린(崔麟), 고원훈(高元勳), 채기두(蔡基斗) 제씨가 유학생으로 동경에 건너왔더라. 그러다가 나는 다시 귀국하여 동래 범어사로 가 있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가서 박한영(朴漢永), 전금파(全錦坡)(고인이 되었으나)의 세 사람과 결의까지 하였다. (한용운, 나는 왜 중이 되었나)

 

한용운의 일본 체험은 앞의 인용에서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앞의 기록에 의하면 한용운은 일본의 새로운 문물과 일본 불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일본행을 결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찾은 곳이 바로 일본 불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조동종의 본산이었다는 사실도 앞의 기록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필자는 한용운이 체류한 일본 조동종 대학이 지금은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으로 개명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 대학을 방문하여 한용운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이 이 대학에 입학하여 학적을 보유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학적 사항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대학 관계자가 고마자와대학 이전의 학교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자료실에서 조동종 대학림 시절의 몇 가지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자료가 바로 조동종 청년 승려들이 주축이 되었던 화융회(和融會)의 기관지和融誌(화융지)라는 방대한 잡지였다. 이 잡지는 1898(명치30)부터 1914(대정3)까지 발간된 것으로서 일본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주도했던 많은 논설을 수록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필자는 이 잡지를 조사하다가 한용운이 1908(명치41) 59일부터 91일까지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曹洞宗)이 운영하는 조동종 대학림(曹洞宗 大學林 *현재 駒澤大學으로 발전)에서 수학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가 화융회(和融會)의 기관지 和融誌(화융지)에 여러 편의 한시를 발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용운에 대한 기록이 화융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명치41) 6월에 발간된 화융지126호이다. 이 잡지의 <사조(詞藻)> 난에 한용운의 한시 두 편이 아무 언급 없이 수록되어 있으며, 잡지 말미의 <휘보(彙報)>(527)<우리 동문이 59일 한용운군을 맞이하였다. 한용운군은 한국 강원도 간성군 건봉사(乾鳳寺)의 도제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용운이 일본에 건너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화융지편집실에 들러서는 필담으로 의사 소통을 한 점, 조동종 동경 출장소에 들러 홍진사(弘津師 * 앞의 한용운의 글에는 홍진 대사의 한자 표기가 다르다)의 소개로 조동종 대학림에 오게 된 연유 등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용운이 타국에 와서 느낀 감회를 손수 한시로 쓴 것을 사조란에 게재한다는 것도 밝혀놓고 있다.

한용운은 조동종 대학림에서 체류하는 4개월 동안 매달 화융지에 한시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용운의 한시 작품들은 한문 원문이 그대로 잡지에 수록되었으며, 조선 승려 한용운이 투고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잡지(190810월호, 1210)의 휘보의 <동인 소식>란에 <한용운군이 91일 귀국하였다. 금년중에 다시 돌아올 것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할 경우, 한용운 190859일부터 91일까지 일본 조동종 대학림에서 체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해야 할 사항이 있다. 한용운이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 해에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였다. 한국 불교는 이미 일본 통감부가 들어선 뒤 1908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중심이 되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립하였다. 이회광은 원종 대종정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일본 불교와의 교섭을 주도하였다. 그는 한국불교와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획책하였고, 합방 직후 조동종과 조약까지 체결하였다. 이같은 이회광의 행태에 반발한 한국의 일부 승려들은 원종의 정통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임제종(臨濟宗)을 내세워 일본 불교와의 연합을 반대하였다. 이 반대 운동에 앞장 선 승려가 바로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후에 이회광 일파가 주도했던 한국불교와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반대하고 한국불교의 주체적인 변혁과 그 대중화를 선도하게 되는 것이다.

한용운이 화융지에 발표한 한시 작품들을 발표 순서에 따라 소개한다. 자료 조사에 도움을 주신 고마자와대학 도서관 참고계의 鈴木英子 선생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독자 여러분께는 한용운 전집1권의 한시 부분에 이 작품 가운데 일부가 출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수록되어 있음을 참고하실 것을 권한다.

 

1. 和融誌, 12卷 第6(1908. 6)

(1) 고향을 그리며(思鄕)

차가운 등불심지 자르지 않아 붉은 불빛 이어지는데

온갖 마음 가라 앉아 혼을 보지 못하겠네.

매화가 꿈길에 들어 학으로 변하더니

옷섶을 잡아 끌며 고향을 얘기해 주네.

寒燈未剔紅連結

百髓低低不見魂

梅花入夢化新鶴

引把衣裳說故園

* 不見魂: 見性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파악함.

 

(2) 산사에서 홀로 새는 밤(山寺獨夜)

이슬 내린 고운 숲엔 달빛이 싸락눈마냥 비추는데

강 너머로 들리는 다듬이 소리, 강 마을 처녀는 처량쿠나.

강 양쪽 푸른 산은 萬古에 변함없어라

매화가 갖 피려하니 스님은 禪定에서 돌아오겠지.

玉林垂露月如霰

隔水砧聲江女寒

兩岸靑山皆萬古

梅花初發定僧還

 

 

2. 和融誌, 12卷 第7(1908. 7)

(3) 빗속에 홀로 읊조리며(雨中獨唫)

海國이라 비바람 잦아

높은 누대는 오월에도 차갑다.

心懷 많은 이국 만리 나그네

말없이 청산을 마주하노라.

海國多風雨

高樓五月寒

有心萬里客

無語對靑巒

* 原文注: 山田湖南이 말하기를 시어는 적으나 그 뜻이 유장하여 더욱 가작으로 추천하였다고 하였다.(山田湖南曰 語短意長 尤推佳作)

 

(4) 봄꿈(春夢)

꿈은 지는 꽃 같고 꿈도 꽃과 같나니

사람은 어떤 호랑나비며 나비는 어떤 사람인고?

나비나 꽃, 꿈 등은 한결같이 마음에 달린 것

봄 신에게 하소연하여 봄날을 붙잡아 달래야지.

夢似落花花似夢

人何胡蝶蝶何人

蝶花人夢同心事

往訴東君留一春

* 人何胡蝶蝶何人: <莊子>齊物論에 나오는 胡蝶夢의 고사를 변형한 것이다. 莊周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나서는, 자신이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는지, 혹은 호랑나비가 꿈을 꿈을 꾸어 자신이 된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흔히 物我相忘의 경지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일순간의 꿈이나 덧없이 지는 꽃 등이 모두가 마음에 달린 일일 뿐이므로, 호랑나비와 장주의 관계처럼 애써 구분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5) 한가로이 읊다(閑唫)

집 한 칸이 太古와 같아

세상과 더불어 상관치 않는다.

종소리 지난 후에 숲은 고요하고

차 연기 사이로 꽃은 한가롭다.

참선하는 마음은 백옥과 같은데

기이한 꿈길이 청산에 이르는도다.

다시 별세계를 찾아가다가

우연히 새 시를 얻어 돌아오도다.

一堂似太古

與世不相干

幽樹鐘聲後

閒花茶靄間

禪心如白玉

奇夢到靑山

更尋別處去

偶得新詩還

 

(6) 제목 없는 시(失題)

인간만사 勝敗란 빈 바둑판과 같은 것

헛되이 천금을 던져 옛 약속을 지키는구나.

호해의 일탕한 심정일랑 모두다 한 올 터럭일 뿐이요

풍진세상 남은 꿈은 몇 번이나 삼생을 거쳤던고?

푸른 산의 황토는 반쯤이 사람의 뼈요

맑은 물의 부평초는 세간의 인정과 같을레라.

책 읽어도 興亡의 구절을 보지 않나니

말없이 달 밝은 동창에 누워 있노라.

輸嬴萬事落空枰

虛擲千金尋舊盟

湖海蕩情都一髮

風塵餘夢幾三生

靑山黃土半人骨

白水蒼萍共世情

讀書不讀興亡句

無語東窓臥月明

 

3. 和融誌, 12卷 第8(1908. 8)

(7) 날 개이자 읊다(唫晴)

한줄기 맑은 경쇠소리가 막 불단에 떨어지니

다시금 새 차잎을 넣고 난간에 기대었노라.

파초우가 갖 개이자 살풋 서늘함이 도는데

빈 주렴에 낮 기운이 수정처럼 차갑도다.

淸磬一聲初下壇

更添新茗倚欄干

蕉雨纔晴輕凉動

空簾晝氣水晶寒

 

(8) 생각 많은 밤에 빗소리를 들으며(思夜聽雨)

동경의 팔월 시절, 편지가 드물게 오는데

가을 상념 아스라하여 의지할 곳 없구나.

가랑비 속 외로운 등잔불에 빗소리도 차갑나니

작년에 병져 누웠을 때와 너무도 비슷하구나.

東京八月雁書稀

秋思杳茫無處期

孤燈小雨雨聲冷

太似去年病臥時

 

(9) 홀로 있는 창가에 비바람은 부는데(獨窓風雨)

사천리 이역 땅에서 홀로 앓는 이 가슴

날마다 귀밑머리결에 센 머리 생겨나네.

낮잠을 놀라 깨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바람이 창에 몰아치다 종소리가 들려오네.

四千里外獨傷情

日日鬢邊白髮生

驚罷晝眠人不見

壓窓風雨又鐘聲

 

4. 和融誌, 12卷 第9(1908. 9)

(10) 가을 어느날의 새벽(秋曉)

빈 방에 저절로 微明이 생겨나니

은하수 기울어 누대로 들어온다.

가을바람은 옛 꿈결에 불어오고

새벽달은 새로 생긴 근심을 비추도다.

잎 진 나무 사이로 등불 하나 보이고

오래된 연못에는 찬 냇물이 흐른다.

유독 두려운 건, 돌아가지 못한 이 나그네

거울 속에 흰 머리만 가득하게 되는 것.

虛室自生白

星河傾入樓

秋風吹舊夢

曉月照新愁

落木孤燈見

古塘寒水流

偏恐未歸客

鏡中霜滿頭

 

(11) 가을 밤 빗소리를 듣다 느낀 바가 있어(秋夜聽雨有感)

영웅도 배우지 못했고 신선도 배우지 못한 채로

국화를 구경하자던 가을날 맹세마저 헛되이 저버렸도다.

파르스름한 등불 아래 비치는 흰 머리, 감개는 끝없는데

가을 비 가을 바람 속에 어느덧 서른 해.

不學英雄不學仙

寒盟虛負黃花緣

靑燈華髮感無限

秋雨秋風三十年

* 黃花緣: 陶淵明처럼 은거하면서 국화를 기르겠다는 뜻으로 풀이됨.

 

(12) 교외로 나갔다가(郊行)

필마로 쓸쓸히 석양에 지나노라니

강둑에 버들은 막 누렇게 시들었네.

고개 돌려도 고향길은 보이지 않으니

만리이역 가을 바람에 고향을 생각하네.

匹馬蕭蕭渡夕陽

江堤楊柳變新黃

回頭不見關山路

萬里秋風憶故鄕

* 原文注: 山田湖南이 말하기를, “篇篇이 모두 고향 그리는 정을 서술하였으니, 천애의 외로운 나그네라면 정녕코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버이을 떠나 출가를 하였다면 心機一轉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山田湖南曰 篇篇皆叙懷鄕之情 天涯孤客固應如此 然已辭親出家 宜心機一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