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사문학》은 1934년 9월 서울에서 그 창간호가 발간된다. 이상의 시 「오감도」의 신문 연재가 중단 된 후 그 특이한 글쓰기 자체가 문단의 화제로 떠오르던 시기에 이 작은 잡지가 초현실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문단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백수를 중심으로 이시우, 정현웅, 조풍연(趙豊衍), 한상직(韓相稷) 등의 문학지망생들이 한데 어울려서 등사판으로 만들어낸 것이 《삼사문학》의 창간호다. 이 동인지는 그 해 12월 제2집을 활판 인쇄본으로 간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데《삼사문학》의 동인들은 1935년 무렵에 대부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경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동인지 제3집(1935. 3)과 제4집(1935. 8)을 계속 발간하였고, 주영섭을 비롯하여 정병호, 황순원, 최영해, 홍이섭, 김진섭, 한태천 등을 동인의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36년 제5집(1936. 10)에 이상의 시 「I WED A TOY BRIDE」를 실으면서 기성 문단과도 교섭하게 된다. 종간호가 된 《삼사문학》(1937. 4) 제6호에도 이상의 수필 「19世紀式」이 실렸다.
《삼사문학》의 창간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신백수(1915-1945)는 서울 태생으로 중앙고보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는 《삼사문학》의 창간호 권두에 이른바 「3 4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예술로의 힘찬 추구’를 내세운다. 신백수는 이 글에서 ‘개개의 예술적 창조 행위의 방법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개방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를 천명함으로써 비슷한 또래의 문학청년들이 지니는 예술적 욕망을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신백수는 창간호부터 주로 시 창작에 주력하여 창간호에 「얼빠진」, 「무게 없는 갈쿠리를 차고」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제2집과 제3집에도 시 「떠도는」, 「어느 혀의 재간」, 「12월의 종기(腫氣)」 등을 내놓았다. 그는 스스로 초현실주의자를 자체했지만 실제로 그가 발표한 시들은 서정시의 전통적인 영역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신백수의 문학 활동은 그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면서 일본 동경으로 그 무대가 넓어졌다.
신백수는 동인지《삼사문학》의 발간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동인지 《창작(創作)》과 《탐구(探求)》를 간행하는 데에도 앞장선다. 1935년 11월 동경에서 발간한 《창작》은 동경에 있는 문학청년을 중심으로 동경 현지에서 엮은 문학 동인지이다. 이 동인지에는 신백수를 비롯하여 주영섭, 정병호, 한천, 장영기 등의 시와 함께 한적선의 희곡과 김일영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동인지 《창작》은 제2집이 1936년 4월에 동경에서 나왔는데, 여기에 황순원이 동인으로 가담하였으며, 제3집(1937. 7)을 서울에서 발간한 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신백수는 이 새로운 동인지에 시 「용명기(溶明期)에 해안(海岸)이 잇든 전설(傳說)」(제1집)을 비롯하여 소설 「송이(松茸)」 등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탐구》의 발간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삼사문학》 동인의 문필활동의 외연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1930년대 중반 《삼사문학》을 중심으로 잇달아 등장한 《탐구》와 《창작》등 새로운 문학 동인지가 당대 문단에 어떤 영향을 남길 수 있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동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우의 경우 다음과 같이 《삼사문학》 시대를 회고하고 있다.
《삼사문학》은 침체한 조선문단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었고 무기력한 문단인에 대한 경고와도 같았다. 그즈음 「구인회」라는 소위 중견 문단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중에 김기림 씨가 꾸준한 성원을 보내었고 죽은 이상이 홀로 우리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을 뿐 다른 대부분의 문단인들은 《삼사문학》을 이해하기는커녕 《삼사문학》의 존재조차 무시하였다.(중략) 1937년 1월 말에 제6집을 내이고 《삼사문학》이 폐간된 후 (중략)《삼사문학》이 어찌하여 폐간하였던가는 지금 아무리 생각하여도 확실치가 않다. 그냥 흐지부지 한 권도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 계속할 흥도 일지 않았고 우리들은 또 떠들만큼 떠들었기 때문에 제풀에 지쳐 넘어져서 몇몇 아류들을 낳고는 누구의 빌표조차 기다리지 않고 그냥 흐지부지 폐간하여 버렸다. 그 누구의 말마따나 젊은 시절의 한낱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삼사문학》이 한때 침체한 조선문단에 한 개 돌을 던져 창을 부수고 청신한 바람을 들이었다는 것과 그 효용을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장차 외국의 현대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 놓았다는 점만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거라. -이시우, ‘「역(曆)」의 내력’ (상아탑, 제7호, 1946. 6).
앞의 회고에서 이시우는 《삼사문학》이 침체한 조선문단에 한 개 돌을 던져 창을 부수고 청신한 바람을 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문단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던 「구인회」 의 김기림, 이상 등이 자신들의 문학을 각별히 성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장차 외국의 현대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위해 《삼사문학》의 문단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시우가 지목하고 있는 「구인회」의 김기림, 이상 등에 대한 언급이다. 그 이유는 「구인회」 특히 김기림과 이상의 문학활동과 그 영향권 안에서 《삼사문학》의 문단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인지《삼사문학》을 중심으로 《창작》과 《탐구》등을 한데 놓고 보면, 《삼사문학》 동인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은 신백수, 이시우, 주영섭, 한태천 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은 1930년대 한국문학사 연구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1934년 이상의 유명한 시 「오감도」에 등장했던 ‘무서운 아해들’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스스로 ‘34’라고 명명하면서 자신들이 문단적 위치를 규정했으며, 이상의 시 「오감도」 속의 ‘무서운 아해들’이 되어 이상의 문학적 행보를 따르면서 그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이상이 철저하게 당대 문단에서 외면당한 것처럼, 이들의 새로운 문학적 시도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새로운 문학정신은 일본 식민지 지배세력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성을 지닌다. 특히 이상 문학과의 연관성을 놓고 본다면 그 전위적 실험성의 의미를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동경에서 만나 것이 《삼사문학》의 동인들이고 이들의 문학적 열정과 새로움의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마땅히《삼사문학》의 문학적 정서를 다시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나는 《삼사문학》 제6호를 확인하고 싶다.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법한데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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