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만남 그리고 헤어짐
- 고 김윤식 교수님을 생각하며
1
내가 김윤식 교수를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서울대 문리과대학이 종합화 계획에 따라 관악 캠퍼스로 이전한 뒤의 일이다.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때 나는 대학원을 마친 후 병역의무를 끝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국문학과의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다른 대학에 시간강사를 맡아 하루 출강하는 일을 빼고는 매일 학과 사무실에 나가서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해야만 하였다. 그 무렵부터 나는 문단의 말석에 끼어 잡지에 월평을 겨우 쓰기 시작하였다. 문리대 시절과 달리 관악 캠퍼스에서는 서울대학교 교양학부 국어과가 문리과대학 국문학과로 통합되면서 인문대학 국문학과가 되었기 때문에 교수님들도 많았고 학과 사무실은 한가한 날이 없었다. 더구나 유신독재 체제에 항거하는 학생 시위로 캠퍼스가 늘 어수선했다.
어느 날 오전이었다. 학과 사무실의 내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렸다. 내가 전화기를 들자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김윤식이오. 내 방에 와서 차 한잔 하고 가소.’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사무실에서 보조로 일하던 아르바이트 학생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내게 말했다. 4층 복도에서 김윤식 교수님을 만났는데 권 선생 나와 있느냐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
나는 김 교수님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교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창문턱에 놓은 컵 하나를 집어서 내게 건네며 결명자 끓인 물을 따라 주었다.
‘앉소.’
나는 의자를 끌어내어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김 교수는 읽던 책을 덮어두고는 앞뒤도 없이 이렇게 물었다.
‘그래, 권형은 앞으로 계속 평론도 쓸 생각이오?’
나는 무어라고 대답도 못하고 엉거주춤했다. 그랬더니 다시 이렇게 말씀을 했다.
‘평론이라는 게 그리 간단치 않은데...... 그렇게 힘들여 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내가 ‘예?’ 하면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으니 김 교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권형이 쓴 월평 보았어요. 그런데 소설 월평이라는 것은 그렇게 힘들여 쓰면 아무도 안 봐요. 월평이라는 것은 작가에게 한 마디 말을 걸어보는 거지요. 말을 한번 슬쩍 걸어보면 그만입니다. 작가는 그걸 봅니다. 자기에게 비평가가 말을 걸어오니까. 그런데 권형은 너무 정직하게 머리로 짜내어 그 짧은 글에서 논리를 세워보려고 애를 쓰더구만. 작가는 자기 소설에 대해서는 조물주이지요. 자기가 만든 소설이라는 작은 세계를 완벽하게 장악하니까. 우리 작가들의 단수가 아주 높아요. 그러니 남의 말에 콧방귀도 안 뀌지요.’
나는 이게 무슨 말씀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하고 뜨거운 결명자 차를 마시기만 했다.
‘문단에 친구가 많소?’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다시 말씀을 이었다.
‘우리 작가들은 모두 똑똑하고 제 잘난 맛에 살지요. 영리하기가 어떤 경우에는 교활하다고 할 정도지요. 세상에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경험도 많고 말솜씨도 좋고 술도 잘 마시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머리로 싸우는 것은 바보입니다. 그러니까 월평에서 작품을 언급하는 것은 한 마디 작가에게 말걸기를 해 보는 정도여야 적당해요. 한 마디 툭 던지면 됩니다. 그러면 작가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다 눈치를 채지요.’
나는 월평의 방법에 대한 김 교수의 설명에 놀랐지만 내 서툰 글이 더 부끄러웠다.
‘권형, 차좀 더 드릴까?’ 하면서 김 교수는 이렇게 말씀을 맺었다.
‘그냥 반가워서 하는 소립니다. 우리 국문과는 문학연구를 중시하니까 문단비평을 모두 우습게 여기지요. 그런데 권형이 잡지에 글을 쓰니 너무 반가웠어요. 나도 십여 년 전에 권형처럼 월평을 시작했을 때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고 따지면서.... 그런데 일반 독자들은 거의 그렇게 쓴 월평을 안 읽어요. 그래서 방법을 바꾸었지요.’
나는 지금도 그 첫 만남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김윤식 교수의 월평은 그 특유의 ‘작가에게 말 걸기’로 유명하다. 작가들과 맞서서 작가들을 긴장시킨다. 자기네 글을 꿰뚫어 보는 눈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게 언제나 문단의 현장에서 글쓰기의 감각을 유지해온 비평가는 김윤식 교수밖에 없다.
2
내가 서울대학교 전임교수가 된 것은 1981년이다. 나이 서른셋이었다. 국문학과는 물론이고 인문대학 전체에서도 연치가 가장 낮았다. 나는 늘 긴장하고 살았다. 나를 대학 입학시절부터 가르치신 선생님들이 많았으니 당연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김윤식 교수는 강의가 있는 날에만 주로 학교에 나왔다. 학과의 교수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학과 운영에 대한 의견을 내는 적도 없었다. 모든 일은 학과장에게 위임하고 가끔 궁금한 일이 생기면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권형, 여기 오소. 차 한 잔 마시고 가소.’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나는 한 번도 다른 일을 핑계대지 않았다. 김 교수의 연구실은 온통 사면이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작은 책상에 늘 원고지를 펼쳐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연구실에는 소파도 없었고 나무 걸상 두어 개가 있을 뿐이었다.
김윤식 교수가 반드시 참가하는 학과의 행사는 석사 박사 학위논문 예비 발표회였다. 대학원 과정에서 일년에 두 차례씩 봄과 가을에 치르는 논문발표회는 엄숙함마저 느껴질 정도로 모두가 긴장해 있었다. 학과의 모든 전공 교수가 나와 앉아 있는 자리인데다가 대학원 과정을 이수중인 학생들은 모두 참관해야만 하였다. 학위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이 연구한 과제의 결과를 처음으로 바깥에 소개하게 되니 발표자들은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발표자에게는 석사 논문의 경우 30분 정도 발표 시간이 주어진다. 박사 논문인 경우는 45분 정도로 길게 발표를 해야 했다. 발표가 끝나면 교수들이 돌아가면서 질의와 강평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도교수가 논문 준비 과정에서 생겼던 일도 소개하고 논문의 주안점도 보충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이 논문 예비 발표에서 발표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교수들의 질문과 강평이었는데, 특히 김윤식 교수를 무서워하였다. 김 교수가 발표 논문에 대해 어떤 부분을 지적하면서 질문을 하는 경우는 그 논문이 비교적 잘 준비되었을 때였다. 김 교수는 어떤 부분을 왜 그렇게 설명했는지도 묻고 또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서양의 어떤 이론서를 들면서 그 책을 읽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런 질문을 받는 발표자는 안도해도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지 않고 김 교수는 마이크를 잡자마자 다그치기도 했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이야기를 지금 어디서 늘어놓고 있느냐?’ ‘이렇게 자기 글에 자신이 없는데 무슨 공부를 한다고 나대느냐?’ ‘당장 집어치워라.’ 하고 불호령을 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호되게 야단을 치고 김 교수는 늘 학문하는 자세를 강조했고, 학문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웠다. 그 자리에서 야단을 맞은 학생들은 그날 밤 자기들끼리 모이는 뒤풀이에서 폭음을 하며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도 나는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김 교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겼다. 그 엄정하신 분이 발표회에서 야단을 친 학생을 그대로 물리치지 않고 다시 연구실로 불러 논문의 문제점을 소상하게 지적해 주었고, 당신이 보던 책을 꺼내어 주고는 한번 자세히 읽어보라고 건네주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도 있다. 학위 과정을 이수한 사람들은 김 교수의 이 투박하면서 때로는 자상한 가르침에 커다란 감화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논문의 내용에 대해 김윤식 교수가 질문을 해왔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기억하려 하였다.
3
김윤식 교수가 자동차 운전면허를 따고 자가용차를 몰고 학교로 출근한 것은 한동안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화제거리였다.
어느 날 오후였다. 김 교수가 예의 그 낮은 목소리로 ‘오소. 차 한 잔 하고 가소.’하며 전화를 하였다. 내가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안에 결명자 끓이는 냄새가 가득했다.
‘여기.’
김 교수는 내게 결명자 차를 한 컵 따라준다.
‘이게 눈에 좋다네요. 눈을 맑게 한다구 권해서.’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잣말처럼 ‘눈은 평생 잘 간수하고 사용해야 하니까.’ 하면서 결명자 차를 마셨다. 그리고는 그날 아침 출근길에 일어났던 황당한 자동차 사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 내 차가 운전 중에 고장을 일으켰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어디 다치신 곳을 없느냐고 물었고 차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했다. 그랬더니 김 교수는 ‘어, 참...’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서는 아무 일이 없이 잘 나왔어요. 큰길로 나섰는데 오늘은 차들이 많아서 한강다리로 들어서는 데 꽤 시간이 걸렸지요. 막 다리 위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차가 이상해집디다. 앞 유리창에 검정 막대기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데 도통 멈추지를 않아요. 나는 놀라서 다리를 다 건너와서는 길가에 차를 세웠지요. 그리고 시동을 끄니까 그 막대기가 턱하니 유리창 위에 걸터 올라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대충 짐작을 했지만 뒷이야기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공중전화로 보험회사에 연락을 했어요. 당장 와서 차를 손봐달라고. 거의 40분 정도가 지나서 보험회사가 보낸 수리기사가 차를 몰고 나타났어요. 무슨 고장이냐고 물어서 내가 설명을 했더니 시동을 한 번 걸더군요. 그리고 무언가를 손댄 것 같은데 그 유리창 위의 막대기가 두어번 움직이다가 멎어버리는 겁니다. 수리기사가 차에서 내리더니 자동차의 본넷을 들어 올려 보고는 이내 쿵 하고 내리닫아요. 그리고는 다 고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지요. 정말 아무 문제없느냐고. 기사는 젊은 녀석인데 픽 한번 웃고는 날 보고 운전 조심하라면서 돌아갑디다.’
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차 앞유리창의 와이퍼에 대해 내가 설명을 하니 ‘권형이 차에 대해서도 잘 아시네.’ 하고 웃었다. 그 뒤 김 교수는 차를 오랫동안 몰고 다니지는 않았다. 가끔 학교에 나오는 경우에도 택시를 이용하거나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탄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무래도 두 다리로 걷는 것이 편해요.’ 하시는 것이었다.
4
국문학과에서는 해마다 대학원생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학술답사를 떠난다. 여간해서 그런 행사에 나서지 않던 김윤식 교수가 충청도 진천 조명희의 고향과 아산 이기영의 고향을 찾아 가는 답사에 참여했다. 내가 답사반 지도교수로 인솔 책임자가 되었는데, 학부생들도 몇 명이 자발적으로 답사에 참가했다.
진천 벽암리에서 조명희와 조벽암의 친지들을 만나고 생가터를 돌아보는 동안 김윤식 교수는 대학원생들에게 조명희의 소련에서의 죽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모두가 점심을 먹은 뒤 읍내 시장 옆의 빈터에 세워둔 버스 있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김 교수는 언제나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았지만 아무도 그 곁에 동석하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김 교수를 어려워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버스에 올라탔는데 키가 작은 학부 여학생 하나가 맨 마지막으로 골목어구의 상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들고 달려왔다. 나는 김 교수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여학생이 차에 오르자 갑자기 앞자리의 김 교수가 여학생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그거 나 하나 주소.’ 하는 것이었다. 여학생이 멈칫하다가는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김 교수에게 드린다. 김 교수는 뜻밖에도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는 그 여학생에게 옆 자리에 앉도록 권하는 것이다. 그 학생이 뒤쪽으로 가겠다고 하였지만 나도 눈짓으로 그냥 그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김 교수가 그 학생을 곁에 앉게 한 후 주고받는 대화를 나는 유심히 엿들었다
‘이게 그렇게 맛이 있나?’
‘예 엄청 시원하고 맛있어요. 제가 봉지를 뜯어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뜯지.’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은 대화가 끊겼다. 버스가 다음 행선지를 향해 출발을 했다.
김 교수가 학생에게 묻는 말이 들렸다.
‘거기 무어가 들었나?’
학생이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손지갑이었다. 학생은 학생증, 주민등록증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김 교수가 그 지갑을 이리 달라고 한다. 학생이 별거 없는데요 하면서 지갑을 펼쳤다. 천원짜리 몇 장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 뒷자리의 내 눈에도 들어 왔다. 김 교수가 그 지갑을 받아 들더니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돈 만원짜리 두 장이었다. 김 교수는 그 돈을 학생의 천원 짜리 몇 장 사이에 끼워 넣고는 지갑을 학생에게 돌려준다.
학생이 놀라면서 말을 못하고 있자 김 교수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이스크림 값을 주는 거야. 그냥 받아두어.’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5
김윤식 교수가 서울대학교를 퇴임하던 해였다. 곧 연구실을 치우겠다며 내게 전화를 하였다. 그날 나는 김 교수와 함께 교수식당에서 점심을 하고는 같이 교정을 걸었다. 김 교수는 생전 묻지 않는 이야기들을 내게 물었다. 아이들 잘 공부하고 있느냐, 마나님(내 아내)은 건강하냐, 고향인 충청도에는 자주 내려가느냐, 등등.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상하게 들려드렸다. 이야기 끝마다 ‘아 그렇구만.’ 하면서 김 교수는 내 이야기를 받았다.
나도 김 교수께 퇴임 후 어떻게 소일하시겠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고개를 들어 관악의 정상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요즘 아주 운동을 많이 합니다. 같이 산에 오르던 출판사 사장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산에 가는 것은 끝내고 요새는 한강변을 걷지요. 매일 두어 시간은 족히 걷는데 아주 기분이 좋아요. 내 몸 간수는 철저히 하려고. 우리집 할망구가 건강이 좋지 않으니 내가 돌보아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걷지요.’
나는 한강변 산책이 아주 좋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이제는 좀 쉬어가면서 글을 쓰시라고 권했다. 뒷사람들도 좀 할 일을 남겨두시라고. 김 교수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서관 뒷길을 돌아 버들골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학생회관의 식당 구석에 차려놓은 커피숍에 들렀다.
‘이 집 커피가 그래도 맛이 있어.’
김 교수는 커피잔을 들고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똑똑한 학생들과 평생을 살았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읽고 싶은 책을 다 읽고, 쓰고 싶은 글을 다 썼다고 생각해요......하지만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권형은 그런 거 못 느끼시오? 여기 관악의 우리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 이제 그만 두려니까 이 자리가 더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성격이 못되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평생을 집에서 학교만 왔다갔다 했는데...... 그래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나를 받아주고 나를 인정해준 곳은 이곳 학교뿐이요...... 나는 작가들과 맞서려고 참 품을 많이 팔았는데...... 내가 쓴 글은 모두 발로 쓴 것이지요.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자료를 뒤졌으니..... 요즘 학생들은 너무 똑똑해서...... 아무도 이런 공부는 안 하려고 하니 걱정이요.’
나는 이런 말씀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제 학계의 후배들이 그리고 제자들이 모두 자기네 몫을 다하고 있으니 걱정마시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그저 앞으로 건강 잘 챙기셔야 한다고만 했을 뿐이다.
6
김 윤식 교수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후학들을 언제나 겁먹게 만들었던 어른이 가셨다.
문단 한복판에 서 계시던 평론가, 글을 읽고 쓰는 자세에 대해 늘 고심하던 큰 학자,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선생님이셨던 김윤식 교수님을 다시는 뵐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식의 회고담을 선생님의 영전에 올려야 한다는 것도 나는 가슴이 아프다. 우리 문단에 이렇게 열정적인 비평가가 없었는데 앞으로 김윤식 교수님과 같은 문학연구가를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떠나신 자리가 더욱 허전하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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