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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나도향의 시조 한 수

나도향이 남긴 시조 한 수

1

옛날 잡지들을 넘기다가 우연히 찾은 것이 나도향(1902-1926)이 남긴 시조 한 수다. 나도향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거니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시조 한 수를 남겼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시조의 제목은 버들이다.

보다가 말하다가
그래도 모자라서
서창 앞 버들가지
내 맘 매어 두고 왔소
바람에 창 두들기거든
내 맘 여겨

 

내 맘을 말로 못하고
버들피리 혀를 내어
허공 중천에
힘껏 내어 불었더니
피리도 제 가슴 타는지
우는 듯 우는 듯

 

봄 정에 애타는 맘
버들야 알듯한데
길길이 늘어져
못에 시쳐 끊어져도
나의 맘 그의 맘을
얽어 놀 줄 왜 모르니

 

이 시조는 나도향이 죽은 뒤에 그를 회고하는 김억의 나도향 군의 유고에(현대평론, 1927. 8)라는 글 속에 포함되어 있다. 김억은 당시 가면(假面)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던 중이었다. 그는 나도향에게 단편소설을 한 편 쓰도록 청탁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부탁한 소설 대신에 시조 한 수를 보내왔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김억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때 내가 단편소설을 하나 써달랜 것이 소설을 써 보내지 아니하고 시조를 보내면서 천하일품의 시조를 보내니 광영으로 알고 실어 주게하는 편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천하일품이면 다른 곳에 팔아서 술잔거리나 삼고 내게는 다시 단편을 써 주게하는 답장을 보내고 다른 원고 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와야 할 원고는 오지 아니하고 기일은 넘어가 버려 그대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 향기롭지 못한 이름이라 할 유고두 글자를 붙여가지고 발표되리라고야 나는 물론이요 나 군 역시 뜻밖이었을 것이니 사람의 일이란 참말 모를 것이다.

나도향이 유작으로 남긴 시조 한 수는 그가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사랑의 절절한 심정을 가슴에 품고 살았음을 보여준다. 나도향이 이 작품을 쓴 시기는 1920년대 중반 문단의 관심사가 되었던 시조부흥운동과 서로 겹쳐 있다. 시조부흥운동은 전통적 문학 형식이었던 시조를 현대적으로 다시 창작하자는 데에 그 목표를 둔 것이다. 최남선을 위시하여 이병기, 이은상 등에 의해 주도된 시조부흥운동은 시조시학의 성립을 촉진하게 되었으며, 시조의 전아한 기풍과 새로운 시대정신의 결합을 시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최남선의 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1926)라는 글은 시조 부흥에 대한 그의 신념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서 국민문학이라는 용어 자체의 출현을 낳기도 했다. 그가 펴낸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1926)는 시조부흥운동의 실천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나도향의 시조는 이와 같은 당대의 문단적 분위기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이상의 변화나 발전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작품이 그대로 그의 유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2

나도향의 본명은 경손(慶孫)이다. 대대로 의약을 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13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종화가 쓴 도향 나빈 소전(신민, 1926. 9)을 보면 그의 조부는 서울 장안에서 이름난 한방의 명의였고 그의 부친 또한 의사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그는 조부와 부친의 권유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의학 공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결국 일년 만에 학교를 중퇴하였다. 그는 집안 어른들의 뜻과는 달리 혼자서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누구도 그의 행동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도쿄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비를 전혀 보내주지 않았다. 그는 일본 생활을 접고 귀국한 후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가족과 관계를 끊어버렸다.

나도향의 문학적 글쓰기는 집안 어른들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가출 소년으로서 겪어야 했던 가난과 방랑 속에서 발전하였다. 그가 문단에 이름을 제대로 알린 것은 1922년 박종화, 홍사용, 이상화, 현진건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백조동인으로 참가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인지의 창간호에 그는 단편소설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했고 잇달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을 내놓으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나도향은 스무 살의 나이에 장편소설 환희(幻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 작품은 나도향의 첫 장편소설일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1917) 이후 신문에 연재된 첫 번째의 창작소설이라는 점에 문단의 관심을 모았다. 더구나 이 작품을 탈고한 것이 나도향의 나이 열아홉 때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자들을 놀라게 했거니와 그 작가적 천품에 모두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을 향한 개인적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 문학에 뛰어든 이 소년 문사를 놓고 시인 홍사용은 오랑캐꽃내 같은 그의 작품은 돌개바람같이 창작계를 풍미했다고 적었다. 나도향은 환희의 연재에 앞서 이 소설이 남에게 내놓기 부끄러울 만치 푸른 기운이 들고 풋내가 난다고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푸른 기운이 돌고 상긋한 풋내가 나는 것으로 도리혀 성과의 예감을 깨닫게 된다고 자부했다. 그의 절친이었던 박종화는 이 소설이 청춘남녀의 연내의 갈등을 그린 것이나 낭만적 경향이 농후하다고 평하면서 좀더 높은 곳에 올라앉아 이 주인공들의 장난을 본다면 한 마당 환희와 같다고 회고했다.

3

장편소설 환희의 중심인물로는 서울 갑부 이상국의 배다른 남매가 등장한다. 은행 직원 이영철과 여학교에 다니고 있는 혜숙이라는 젊은이다. 소설의 이야기 속에서 두 남매가 각각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과 참된 행복이라는 주제는 당대의 현실로 본다면 개인의 자기 각성이라는 계몽적 담론과도 이어진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들의 열정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은 채 두 남매가 애욕의 문제에 얽혀 고뇌 속에서 좌절하고 파멸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런데 환희의 여주인공 혜숙이 물질적 욕망에 빠져들어 자기 사랑을 배반하게 되는 모티프는 이미 신파소설 장한몽을 통해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와 흡사하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을 관심을 모았던 영철과 기생 설화의 연애는 자기모순을 헤쳐 나가기 위해 고뇌에 휩싸여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낭만적 연애는 무정에서 기생 박영채가 화류계를 벗어나게 되는 계몽적 서사구성의 허구성에 대응하고자 하는 작가적 의욕을 보여준다. 연애의 기쁨도 사랑의 고통도 이 소설 속의 젊은이들에게는 모두 자신들의 몫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도향은 환희의 연재가 끝나자 장안의 스타가 되었지만 엄격한 조부는 끝내 그의 문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1925년 단편소설 물레방아, , 벙어리 삼룡등을 통해 보다 완숙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한 뒤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다. 하지만 가난한 그를 맞아줄 수 있는 어떤 자리도 도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1926년 병객의 몸이 되어 돌아온 그는 끝내 가족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스물다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박종화는 , 박행한 천재여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였다. 나도향의 죽음은 초창기 문단이 처음으로 쓰는 가장 가슴 아픈 애사(哀詞)가 되었다. 나도향의 시조 버들은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써놓은 아픈 사랑의 노래처럼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