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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시집

시인 노천명의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

시인 노천명의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

 

 

 

1

 

[창변(窓邊)]은 노천명(盧天命)의 두 번째 시집이다. 해방 직전 19452월 매일신보사(每日新報社)에서 간행하였다. 당시 노천명은 매일신보사 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의 한글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책을 내기 어려웠던 점을 생각한다면 태평양전쟁이 최고의 고비에 이르던 시기에 이 시집의 출간이 이루어진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지(韓紙)로 인쇄된 이 시집에는 모두 29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노천명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남사당을 비롯한 장날, 연자간, 잔치, 돌잡이등은 토속적 풍물에 녹아들어 있는 삶의 애환을 풍부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초기 시를 대표하는 사슴과 동궤에 있는 자화상, 창변, 등에서 확인되는 시적 자기 인식과 그 절제의 미학도 주목된다. 푸른 오월, 사월의 노래, 보리등에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한 감각적 묘사와 관능미는 자연을 통해 본원적인 생명력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세를 잘 보여준다.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에서 볼 수 있는 시인 특유의 자의식과 섬세한 감각이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노천명의 남사당을 보면 남사당 패거리의 떠돌이 생활과 그 뒤에 숨겨진 삶의 비애가 정감있게 그려져 있다. 이 시가 보여주는 토속적인 풍물에 대한 묘사의 사실성은 1930년대 후반 시단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잡은 이른바 풍물시의 특성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얼굴에 분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 내리는 사나이

 

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

날나리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르고 나는 향단(香丹)이가 된다

 

이리하여 장터 어느 넓은 마당을 빌려

램프 불을 돋운 포장 속에선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

 

산 너머 지나온 저 촌엔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와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인 삐리라고 불렸던 초입이다. 원래 남사당패 안에서는 패거리에 가담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입자들이 각자의 특기에 따라 연기를 익히면서 잔심부름까지 도맡아한다. 그런데 이들은 특기를 연마하여 연행자로 나설 때까지 대개 여장(女裝)을 한다. 실제로 시의 텍스트에서 시적화자인 는 향단이 복색의 여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이 시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연에서 3연까지를 보면, 남사당 패거리 안에서 라는 시적화자가 수행해야 하는 성역할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분을 바른 얼굴, 길게 따 내린 삼단 같은 머리, 다홍치마 등을 통해 여장한 자신의 겉모습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다. 이 겉모습은 구경꾼들을 위한 분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패거리 내부에서의 자신의 성역할을 암시한다. ‘램프불을 돋운 포장(布帳) 속에선 / 내 남성(男聲)이 십분 굴욕된다라는 구절은 스스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애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시적 화자의 자의식을 드러내어 주고 있다. 물론 는 자신만의 특기로 어떤 기예를 연마할 때까지 이 굴욕의 세월을 견뎌야 한다.

이 시에서 4연 이하의 후반부는 남사당패의 유랑의 삶이 그려지고 있다.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쳐야 하는 이들의 고달픈 삶과 거기 스며들어 있는 비애를 엿볼 수가 있다. 시적화자는 산 너머 지나온 저 촌엔 / 은반지를 사 주고 싶은 /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그 처녀에게 자신의 정분을 표시할 수 없다. 누구든 남사당패에 들어오면 평생을 이 패거리들과 함께 떠돌며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화자인 를 통해 남사당패의 일원으로서의 성역할과 실제의 성정체성이 분리 도치되는 현상을 간취하고 있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는 남사당패 안에서 여성으로 분장하고 지내지만, 실제로는 산 너머 마을에서 눈여겨보았던 처녀에 대한 그리움을 지닌 남성임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애틋한 사랑의 정은 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연이 끝난 다음날에는 다시 다른 동네를 찾아 떠나야 하는 신세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남사당 패거리를 그려낸 단순한 풍물시는 아니다. 남사당패의 일원이 되어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한 인물을 시적화자로 설정하고 그 내면적 갈등과 비애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천명의 남사당을 읽으면서 수년전에 작고한 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이 쓴 <남사당패연구>라는 책을 다시 넘겨보았다. 이 시의 시적화자의 성역할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남사당(男寺黨)은 남자들로 구성된 떠돌이 예인집단이다. 조선 후기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놀이패로서 마을을 떠돌면서 각종 기예를 보여주었다. 당시 민중들 사이에 꽤나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던 남사당에 대해서는 문헌상의 기록이 별로 없단다. 어디서 어떤 형태로 이러한 특징적인 유랑(流浪) 예인집단(藝人集團)이 생겨났는지를 기록상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남사당패는 그 집단의 우두머리를 꼭두쇠라고 하며 이를 중심으로 수십 명의 놀이패가 움직인다. 이들은 흔히 볼 수 있는 농악과 같은 풍물놀이, ‘버나라고 하는 대접 돌리기 기술, ‘살판이라고 하는 땅재주, ‘어름이라고 부르는 줄타기, 탈놀음을 말하는 덧뵈기덜미라는 꼭두각시놀음 등의 놀이를 연기한다. 대개는 마을에서 이들의 놀이를 허용하면 큰 마당이나 장터에서 밤새워 놀이판을 벌인다. 특별한 보수는 없으며 숙식 정도를 해결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놀이판이 다 끝나면 다른 마을로 옮겨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남사당패가 남자로만 구성되어 있는 내부적으로 일종의 남색조직(男色組織)이라는 점이다. 이 조직에 처음 입문한 초입자(나이 어린 삐리)가 여성 구실을 감당하면서 상급자의 암동모가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노천명의 남사당에 등장하는 라는 시적화자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바깥으로는 여장을 한 채로 구경꾼들의 흥취를 돋우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초입자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다. 이 같은 남사당패의 특이한 조직을 알아야만 이 시의 시적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남사당패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조선시대 지배층의 시각으로는 남사당패가 한낱 풍속을 해치고 도덕을 무너뜨리는 패속패륜집단(敗俗悖倫集團)으로 보였을 것임은 물론이다.

 

3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1-1957)은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에 서울로 올라와 진명여학교를 졸업하였고 1930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이화여전 재학 중 19326월 잡지 신동아에 시 밤의 찬미, 단상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본격적인 문단활동은 1935시원(詩苑)동인으로 참여하여 시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화여전 졸업 후 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해 1937년까지 근무했으며, 1939년까지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으면서 활발한 시작 활동을 했다.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8)에는 시인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낸 작품들이 많으며, 시인 자신의 고독한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탐구하는 시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시집에 시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시 사슴등이 있다. 일제 말기에 매일신보사 기자로 활동하였고, 친일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으면서 친일적 문필활동에 앞장섰다. 해방 직전 출간한 두 번째 시집 󰡔창변󰡕(1945)에는 노천명의 시 세계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다.

1945년 광복 후 서울신문사 등에서 일했고, 임화 김남천 이태준 김기림 등이 주도하던 좌익문단의 조선문학가동맹에도 참여하였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좌익 활동이 문제가 되어 전쟁 직후 부역자 처벌 특별법에 의해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김광섭, 이헌구 등의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6개월만에 출감하였다.

한국전쟁 직후에 발간한 세 번째 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서는 앞서 보여주었던 고독한 자아의 모습이 한층 심화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말기의 친일 훼절행위와 한국전쟁 중의 부역혐의에 대한 자기비판과 내적 갈등, 옥중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내성적인 주제와 자기 관조의 세계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에는 개인적 서정의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노천명의 주된 시적 경향과는 달리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가톨릭에 입교하였으며 독신으로 살면서 1957년 뇌빈혈로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시를 창작했다.

노천명의 시는 뛰어난 언어 감각과 서정적 감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노천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으로서의 시인의 길을 헛디뎠다. 세련된 시적 감각을 지녔던 이 여성 시인은 자신을 향하여 밀려오는 모든 유혹과 강요를 뿌리칠 힘을 갖지는 못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요구에 따라야 했고, 일본군에 강제 징발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대일본제국을 위해 쓰러져간 조선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써야만 했다. 이로 인하여 노천명의 이름 앞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좌익 문단에 가담하여 정치시대의 이념적 요구를 따랐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서울에 인민군이 진입하게 되었을 때 노천명은 피난길을 놓치고 서울에 숨어 있다가 인민군에게 발각되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시인 노천명을 인민군은 자신들의 문화선전에 앞장세웠다. 노천명은 여기서도 그들의 요구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노천명은 경찰에 체포되었고 북한 공산당과 인민군에 협력한 부역자가 되었다. 이 엄청난 시련을 시인이라는 천명으로만 돌리기에는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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