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명시집

서정주의 <화사집>

 

서정주의 화사집(花蛇集)

 

 

화사집(花蛇集)은 시인 서정주의 첫 시집이다. 1941년 남만서고(南蠻書庫)에서 간행되었다. 이 시집을 간행한 남만서고는 시인 오장환(吳章煥)이 운영하던 작은 출판사다. 오장환은 시 동인지 <시인부락>에서 서정주와 함께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자기 출판사에서 서정주의 첫 시집을 간행하면서 이른바 특제본(特製本)과 병제본(竝製本)이라는 이름으로 장정을 달리한 두 가지 형태의 시집을 내놓았다. 이 시집의 내제지(內題紙)를 펼쳐 보면, ‘100부 한정 발행, 1~15번은 저자 기증본, 16~50번은 특제본, 51~90번은 병제본, 91~100번은 인행자(발행인) 기증본이라고 구분하여 두고 해당 책이 그 중 번이라는 표시도 했다. 시집의 판형은 특제본의 경우 변형 A5, 전체 76면이다.

화사집의 특제본은 전통적인 황갈색 능화문(菱花紋)의 표지로 장정한 양장본인데, 비매품인 저자 기증본의 경우 책의 표지에 시인 정지용이 추사의 필체를 본떠 궁발거사(窮髮居士) 화사집(花蛇集)’이라고 직접 써넣었다. 판매용 특제본은 조선시대 전통 서적의 형태를 본떠 흰색 한지에 세로쓰기의 붉은 한자 붓글씨로 시집(詩集) 화사(花蛇) 서정주(徐廷柱)’라고 써서 표지 위에 붙였다. 당시 판매 가격은 6원이었다.

병제본은 일종의 보급판인 셈인데 반양장의 회색 표지에 시집(詩集) 화사집(花蛇集) 서정주(徐廷柱) ()’라고 가로쓰기 한자로 인쇄하여 제자(題字)를 표시했다. 본문의 편집 체제나 인쇄 방식은 특제본이나 병제본이나 그대로 일치하지만, 병제본은 인쇄용지와 장정을 달리했기 때문에 판매 가격을 180전으로 매겼다. 최근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책등에 붉은색 실로 화사집이라는 한자를 수() 놓은 호화장정본이 나와 화제가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 치장한 책은 아마도 특제본에 누군가 손을 대어 호사스럽게 표지를 바꾸고 특별히 보관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화사집에는 시인 서정주의 초기 시 24편이 모두 5부로 나뉘어 수록되었으며, 김상원(金相瑗)의 발문이 붙어 있다. 1자화상(自畫像)’에는 같은 제목의 시 1, 2화사에는 화사·문둥이·대낮·입마춤·가시내8, 3노래에는 수대동시(水帶洞詩)··서름의 강()·()·부흥이7, 4지귀도시(地歸島詩)’에는 정오(正午)의 언덕에서·고을나(高乙那)의 딸·웅계(雄鷄) ()·웅계 하4, 5()’에는 바다·()·서풍부(西風賦)·부활4편이 각각 실려 있다. 서정주가 1935년부터 1940년 사이에 동인지 <시인부락>을 비롯하여 여러 잡지와 신문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화사집의 시들은 관능미와 생명력에 대한 강렬한 찬사가 돋보인다. 초기 시의 경향을 잘 드러내어 주는 표제작 화사이라는 자연물과 순네라는 처녀를 대비적으로 등장시킨다. 기독교의 성서에 등장하는 은 인간을 유혹하여 욕망의 구렁으로 빠지게 만든 벌로 땅을 기어 다니면서 살게 되었다는 점에서 관능적인 유혹과 동시에 원죄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을 돌팔매를 하면서 따라가는 것은 뱀에 대한 혐오와 함께 관능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유혹을 동시에 말해준다. 에덴동산의 뱀과 이브를 연상하게 하는 이 시의 장면을 보면 작품 자체가 신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의 초기 시는 본연의 생명과 욕망, 관능의 미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 정서의 근저에 서러움을 동반하고 있다. 자화상에서 시적 화자가 애비는 종이었다.’ 라고 언명하고 있는 것은 시인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숨겨진 본래적인 모습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비롯되는 서러움은 현실적인 삶이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슬픔이나 분노와는 다르다. 이것은 시인 서정주가 발견한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는 정서의 원형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