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정지용이 1948년에 쓴 산문 한편을 소개한다. 자료를 찾다가 발견했다면서 제자가 내게 보내주었다. 요즘 세태와도 그대로 통하는 이야기라서 여기 소개한다. 글의 제목은 <혈거축방(穴居逐放)>이다. <주간서울> 11월 29일자에 수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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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쓰려다가 책을 펴니 두 가지가 함께 제대로 될 리 없다. 담배에 자주 불을 켜대기에 신경이 초조하여진다. 앉았다 누웠다 종긋거려야 낮잠도 들지 아니한다. 만일 정식으로 실직을 한다면 이러한 태타(怠惰)가 실직의 초보적 질상(疾狀)일 것이다. 마누라와 단둘이 남아 있는 날, 마누라도 부지중 집에서 없어졌다. 간단한 빨래를 가지고 나갔을 것이다.
‘이리 오너라’ 소리도 없이 발소리도 없이 들어 선 여인네 하나가 디딤돌까지에 올라서서 겨우,
"좀 여쭐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며 나는,
"네에―" 하였다.
그 여인네는 나이는 우리와 근사할 것이나 마누라와 같이 주름살이 없다. 그 대신 딱 버러지고 얼굴은 검붉고 차림은 중류 이하나 더럽지 않고 말씨는 서울 바로 문밖 말이고 유창하다. 이이가 만일 시골 주막집 마누라라면 입이 험한 늙은 술꾼쯤은 ‘여편네 행락이 아니겠는데―’ 이런 언사를 들을 수도 있을까 한다.
그 여인네의 ‘여쭐 말씀’이란 사정은 대충 아래와 같다.
이북에 볶이어 살 수가 없어서 서울로 왔는데 방 한칸 얻을 도리가 없고 날은 추워오고 영감과 열세 살짜리 딸 하나와 우선 잘 데를 구하다가 댁 문전 방공호(防空壕) 자리에 들어가 우선 자기나 하고 길거리에서 낮에 빈자떡 장수라도 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집앞에 방공호가 있었던 지를 이사 온지 일년이 넘어도 모르고 지났다. 방공호가 과연 있었던 것이 완전히 메워놓고 입구를 돌로 이를 맞춰놓았기에 내가 모르고 지난 것이다. 그러나 행길 하나 건너 산끝을 깎은 자리라 바로 우리 대문과 방공호 입구가 서로 맞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서 방공호 개폐의 권한이 우리 집 대문 안에 있을 법이 없는 것이다. 허가가 아니라 위로로 좋으실 대로 하시라고 하였고 이왕이면 반장집과 이웃 몇몇 집에 양해나 통해 보고 흙을 파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럴 까닭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만 우리 집 동향 대문이 결재한다는 이론이 서는 모양이다.
"우리 집에 비는 방이 있으면 거저라도 빌려드려야 하겠는데 보시다시피 방 셋에 식구는 많고 하니 매우 곤란하시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방공호 자리를 파내시지요."
하고 삽을 빌려주었다.
"이북에서 사시기가 어떠하십데까?"
"말도 마십시오. 사철 부역에 공전(工錢) 한푼 아니 주고 농사도 장사도 못하게 합니다."
"생업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였지요."
"사시던 집은 어떻게 하시고 오섰습니까?"
"내버리고 왔지오."
"인심은 어떻습니까?"
"인심은 그래도 이남이 낫지오. 이남에 오니 인심이 예전 같구 먼저 숨을 돌리겠습니다."
보아하니 이 여인네의 문화 정도가 그래 혈거생활을 해야만 할 것이 아니었다.
오후에 운동 부족적 증상으로 대문 밖을 나가보니 영감 내외와 어린 딸이 어떻게 억세게 파내었던지 방공호 안이 분벽(粉壁)이 되어 있다.
"밤에 주무시다가 위험하지 않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춥지 않으시겠어요?"
"흙속이라 괜찮습니다."
"깔기는 무엇을 까시나?"
"혼다다미를 깔지요."
"고생하십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덕택으로 삼동이라도 나겠습니다."
저녁때 동네가 시끄럽게 대문 앞에서 야단이 났다. 동네서 일어나 당장에 방공호를 다시 메워 놓으라는 것이요 영감 내외와 어린 딸이 곱절 노동속력으로 메우는 중이다. 이유는 방공호를 파놓으면 나중에 문둥이들이 들어와 원거민(元居民)을 쫓아내고 저희들이 들어 동네가 문둥이 촌이 된다는 것이다. 문둥이가 아니 오더라도 동네가 지저분하여져 못쓴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의 마땅치 못한 언사가 내게로 들으라고 오는 것이다. 아침에 나갔다가 돌아온 큰 아들놈까지 대문 안에 들어오기 전에 동네사람들과 한통이 되어서 주책없이 떠들어댄다. 먼저 아들놈의 따귀를 주먹으로 갈기고 싶도록 화가 나고 무안하다.
"이놈아! 이리 들어오너라!"
아들놈을 불러들여 세워 놓고,
"이 못된 놈의 자식! 그 방공호가 우리 땅이냐? 웨 너도 한몫 거드는 것이냐?"
아들놈 탄압이야 문제없었다.
밤에 역시 전등이 켜지지 않았다. 원고도 쓸 수 없고 잠도 아니 오고 취할 수도 없고 답답하였다. 다시 영감 내외와 그의 어린 딸과를 생각하여 보면 이북에서 이남 인심을 찾아와서 다시 혈거(穴居)에서 축방(逐放)을 당하고 났으니 그들은 다시 또 어느 인심을 찾아 위도선(緯度線)을 넘어가야 하는 것일까? 원고는 쓸 수 없다 할지라도 원고의 구상만이라도 암흑 속에서라도 결어를 맺어야만 한다.
인심의 후박(厚朴)을 가리어 돌아다니는 것도 늙어서 고향이라고 찾아가는 것과 함께 그것이 봉건시대적 폐풍(弊風)의 하나이다. 토지와 생활과 근로를 완전히 인민으로서 획득한 후에 ‘인심’이 바로 서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동향 대문 때문에 내가 다소 관후(寛厚)하였느냐 반성될 때 나의 책임감 없는 ‘인심’이 저윽이 편편치 않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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