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 기념행사가 처음 열린 것은 1923년 5월 1일이다. 이 날이 ‘어린이날’로 제정된 것은 방정환이라는 선구자의 개인적인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벌써 90년이 넘었다.
방정환은 1899년 서울의 전형적인 중산층 상인의 자제로 태어났고, 보성소학교 유치반에 입학하여 신교육에 눈을 뜬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방정환은 가업을 이어 가기를 원했던 부친의 뜻을 따라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기능교육 중심의 상업학교가 적성에 맞지 않아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중퇴하였다.
1915년 17세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서류를 필사하는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던 그는 이 해에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孫秉熙)의 딸과 결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장인인 손병희의 후원으로 방정환은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이후 방정환은 유광렬, 이중각 등과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고, 1919년에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그는 1920년 천도교에서 발행한 종합잡지인 <개벽>의 도쿄 특파원으로 임명받은 후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 창립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도요(東洋)대학 철학과에 특별청강생으로 적을 두고 철학, 아동문학, 아동심리학 등을 공부했다.
방정환은 1923년 3월 도쿄 하숙집에서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 조직을 위한 준비모임을 가졌으며, 도쿄에서 편집한 최초의 어린이 잡지 <어린이>를 개벽사에서 3월 20일 창간하였다. 그리고 3월 30일 윤극영, 마해송, 손진태, 정인섭 등과 색동회를 창립하였다. 방정환은 색동회를 기반으로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면서 이 해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이 날이 ‘천도교소년회’의 창립일이었기 때문에 매년 어린이날 행사를 치루면서 자연스럽게 천도교의 지원도 받았다.
그런데 5월 1일 어린이날 행사는 1928년부터 경찰의 탄압으로 금지되었다. 일본 경찰은 어린이날이 ‘메이데이’ 날과 겹치자 이를 문제삼았다. 색동회는 경찰의 간섭을 피하여 이해부터 해마다 5월 첫 일요일로 어린이날을 정하여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일제 말기에는 어린이날 행사 자체가 일제의 탄압으로 금지당하기도 했다.
어린이날은 해방 이후 1946년 5월 5일로 공식 제정되면서 부활하였고 1975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데에 앞장섰고 최초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만들었지만, 그의 큰 뜻을 널리 펴지 못한 채 1931년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주도하여 작성했던 1923년 5월 5일의 ‘어린이날’ 선언문에는 ‘어린이를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허용해야 한다.’ 라는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강조하고 있는 혁신적 사상이 담겨 있다. 특히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연소노동을 금지해야’ 한다든지 ‘어린이가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린이 존중의 사상이 얼마나 절실했던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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