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학의 주변

이 가을엔 시집 한 권을

이 가을을 한 권의 시집을 펴들고 시작하면 어떨까?

청명한 가을이 저만치 다가와 있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이제는 뒷걸음친다. 여름내 땀에 절었던 고된 삶의 시름도 서늘한 바람에 씻겨 물러날 차례다. 고개를 들고 파르라니 펼쳐지는 하늘을 보면 창공에 아득한 꿈이 다시 열린다. 가진 것이 없어도 마음이 풍성하다. 시인 김남조는 가을이 이렇게 큰 몸인 줄 / 내 몰랐어라.’ 라고 노래한 적이 있다. 가을이 되어야 모두가 넉넉해진다는 것을 시인은 이렇게 친절하게 가르친다.

시는 인간의 심성에 따라 그 내용과 형식이 빚어진다.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삶의 다양한 경험과 그 충동을 모두 감싸 안는다. 시는 그것을 찾아 읽는 사람에게만 충만한 감성으로 살아나며, 자기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초월의 힘을 발휘한다. 가슴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시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시는 마음을 말한 것(詩言志)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서 나온다. 삶이라는 것도 사실은 마찬가지다. 마음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닌가? 공자가 일찍이 시 삼백 편에 생각의 간특함이 없다.’ 라고 말했다는데, 시 정신의 본질도 거기 있는 셈이다.

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각박하다. 하루하루의 생활을 꾸려가기에 모두가 힘들고 바쁜데도 정치는 더러운 치정(癡情)처럼 얽혀 싸우기만 한다. 큰 목소리로 경제를 걱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동산 아파트 값에만 매달린다. 텔레비전은 뉴스조차 개그처럼 만들고 그악스럽게 안방의 갈등만 부추긴다. 자극적인 흥미를 찾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시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답답하고 재미없는 생활 속에서 시를 운위한다는 것 자체가 세상 물정 모르는 한가로운 일처럼 보일 뿐이다. 그러니 시를 가까이 하는 일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다. 시는 오로지 시인들만의 몫이고, 일상의 인간들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 사실이다.

시는 그것을 아는 사람의 곁에만 자리한다. 시는 현실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을 돌아볼 때 그 존재 의미가 더욱 살아난다. 자기 내부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관찰하고자 할 때에만 시의 의미가 중요시된다는 말이다. 시는 자꾸 읽어야만 가까워진다. 처음부터 무엇을 알아내려고 고심할 필요가 없이 그저 시의 언어와 그 행간을 따라가면 된다. 자꾸 읽어 보면 시의 구절을 저절로 욀 수 있게 되고, 욀 수 있을 정도가 되면, 저절로 그 뜻이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처음부터 욕심을 낼 일도 아니다. 시집 한 권은 커피 두어 잔 값이면 충분하고 누구나 책방에 가면 쉽게 골라잡을 수 있다. 가장 빛나는 언어로 이루어진 시집 한 권을 값싸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한 달에 시집을 한 권씩 사서 읽는다면 그건 정말로 헐한 값에 가장 고상한 취미를 살리는 방법이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서늘하다. 시조시인 조오현은 하늘도 가을하늘은 강물에 목이 잠겨 있다.’ 라고 노래한다. 파란 강물처럼 가을하늘이 넘쳐나고 있다. 마음보다 먼저 손길이 풀어헤쳤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시인 김현승은 이맘때가 되면 /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 가을하늘만큼이나 멀리멀리 당신을 떠나는 것입니다. / 떠나서 생각하고 / 그 눈을 나의 영혼 안에 간직하여 두는 것입니다.’ 라고 기도한다. 이처럼 우리 모두 한 권의 시집을 펴들고 이 가을을 맞이하면 어떨까? (권영민)

 

'문학의 주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로 찾은 시인 정지용의 산문  (0) 2014.04.19
새로 찾은 시인 정지용의 산문 <혈거축방>  (0) 2014.03.03
무산 시조를 이야기하다  (1) 2013.08.16
간판시비  (0) 2013.03.27
일본의 동경대학 풍경  (0) 201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