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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백석의 '칠월 백중' 혹은 풍속시

칠월 백중혹은 풍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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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 백중(七月 百中)’. 백종(百種) 혹은 백중(百衆)이라고도 했고 중원(中元)이라고도 칭했다. 음력 7월 보름 명절을 말한다. 예전의 세시풍속을 보면 음력에 따라 24절기로 나뉘어 해마다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 백중도 아주 중요한 세시풍속의 하나였다. 농경생활을 중심으로 하는 마을 공동체에서 관습적으로 이어온 의식과 놀이 가운데 하나가 백중놀이이다. 하지만 지금은 백중이라는 말조차 들어보기 어렵다. 백중 장터니 백중 놀이니 하는 것도 모두 사라져버린 옛 풍속이 되고 말았다.

백중은 불가(佛家)의 우란분회(盂蘭盆會), 또는 우란분재(盂蘭盆齋)라고 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불경 가운데우란분경(盂蘭盆經)이라는 경전이 있다. 이 경전은 부처님의 수제자인 목건련(目犍連)의 덕을 기리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련존자는 부처님의 믿음으로 열린 혜안(慧眼)을 얻게 되었다. 그는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가 극락으로 가지 못하고 아귀보(餓鬼報)를 받아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목련은 자신의 신통력을 발휘하여 어머니를 아귀의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업()이 두터워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할 수가 없었다. 목련은 부처님께 어머니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줄 것을 간청하였다. 부처님은 수행승들이 하안거를 마치는 자자일(自恣日)에 해당하는 음력 715일에 부처님과 승려에게 백 가지의 음식과 다섯 가지의 과일 등을 정성스럽게 공양을 올리면 비원(悲願)을 이루는 것은 물론 돌아가신 어머니도 천계(天界)의 복락을 누리게 된다고 하였다. 이 가르침을 받은 목련은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함으로써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우란분재의 시초다. 이 특이한 불교 의식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전래하였고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실제의 의례 내용을 소개하는 문헌 자료도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불가의 우란분회는 음력 715일에 갖은 음식과 과일을 마련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조상의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으로 거행된다.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공양하여 부처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과 비슷하게 우란분절에는 백등(白燈)을 밝혀 죽은 조상을 추모한다. 이러한 의식이 민가에도 전해져 칠월 보름날을 망혼일(亡魂日)’이라고 하여 조상차례를 지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네가 알고 있는 칠월 백중은 불가의 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백중은 세시풍속으로 반복되면서 널리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농촌생활에서는 봄에 모내기를 끝낸 후에는 여름철이 되기까지 밭과 논의 김매기에 가장 바쁘게 지낸다. 그런데 음력 7월 보름 무렵이면 세 벌 김매기가 다 끝나고 지독한 무더위가 시작된다. 농사꾼들이 허리를 펼 수 있는 시기에 해당된다. 더위를 피하면서 곧 돌아올 가을을 기다리는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이 때를 맞춰 생겨난 것이 백중이라는 속절(俗節)이다. 농사꾼들은 이날을 호미씻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된 농사일을 잠시 멈추고 잔치와 놀이판을 벌여 즐기면서 더위에 시달린 심신을 달래고 힘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농사를 크게 짓는 집에서는 백중날이 되면 일꾼들에게 용돈(백중돈)을 주고 즐겁게 쉴 수 있도록 하였다. 머슴들과 일꾼들은 이날 특별히 장만한 아침상을 받고 새 옷에 돈까지 얻게 되었다. 심지어는 머슴을 소에 태우거나 가마를 태워 흥겨운 하루를 보내도록 했다. 주인댁으로부터 받은 백중돈을 가지고 일꾼들은 장터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놀이를 즐겼다. 이날에 맞춰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 한복판에는 특별히 백중장이 열려 장사꾼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장터에는 풍악이 울리고 씨름판이 벌어지기도 하였고 여러 놀이판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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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이 쓴 작품 가운데 칠월 백중이라는 흥미로운 시가 있다. 해방 직후인 1948년 잡지 문장에 발표된 작품이다. 당시 백석은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 정착해 있었다. 이 작품은 그가 서울의 친구들에게 보낸 원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칠월 백중날에 볼 수 있는 고향의 풍속을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을 통해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를 일종의 풍속시또는 풍물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의 내용을 보면 백중날 약물터에 크게 장터가 열린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적 화자는 머슴이나 일꾼들이 백중날을 즐기는 모습보다는 약물터에서 열린 백중 장터를 구경하러 가는 것은 새악시들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백중날 약물터에 열린 장터 구경을 나가는 새악시들의 옷차림과 발걸음이 가볍다. 이들은 고개를 넘고 넘어 약물터 백중 장터에 모여든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과 함께 어울린다. 백중날 약물터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시적 공간 속으로 모든 관심이 집중되면서 시적 감흥도 고조된다. 이 정서적 고양 상태에서 백중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모두가 후줄근하게 젖지만, 오히려 마음은 붕가집(친정) 갈 생각으로 들떠 있다. 한여름 보름 정도를 친정에 가서 지내다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언어적 표현 가운데에는 생소한 평안도 방언이 다수 활용되고 있다. 자기 지역의 방언을 그대로 시적 언어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은 시인 자신이 토착적인 방언에 대한 애착과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언의 활용을 통해 시의 내용에서 일상적 경험을 더욱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마을에서는 세 벌 김을 다 매고 들에서
개장 취념을 서너 번 하고 나면
백중 좋은 날이 슬그머니 오는데
백중날에는 새악시들이
생모시치마 천진푀치마의 물팩치기 껑추렁한 치마에
쇠주푀적삼 항라적삼의 자지고름이 기드렁한 적삼에
한끝나게 상나들이옷을 있는 대로 다 내 입고
머리는 다리를 서너 켜레씩 들어서
시뻘건 꼬둘채댕기를 삐뚜룩하니 해 꽂고
네날백이 따배기신을 맨발에 바꿔 신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가는데
무썩무썩 더운 날에도 벌 길에는
건들건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허리에 찬 남갑사 주머니에는 오랜만에 돈푼이 들어 즈벅이고
광지보에서 나온 은장도에 바늘집에 원앙에 바둑에
번들번들하는 노리개는 스르럭스르럭 소리가 나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오면
약물터엔 사람들이 백재일치듯 하였는데
붕가집에서 온 사람들도 만나 반가워하고
깨죽이며 문주며 섶가락 앞에 송구떡을 사서 권하거니 먹거니 하고
그러다는 백중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
호주를하니 젖어서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꿈에도 못 잊는 붕가집에 가는 것이다
붕가집을 가면서도 칠월 그믐 초가을을 할 때까지
평안하니 집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고
애끼는 옷을 다 적시어도 비는 시원만 하다고 생각한다

 

백석의 시 칠월 백중은 소박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농민들의 삶의 모습이 토속적 어휘를 통해 감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는 다채로운 시적 심상을 활용하여 시적 공간을 감각적으로 확장하면서 그 속에 고향이라는 원초적인 체험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해 놓는다. 이러한 시의 방법은 한국의 근대시가 감각적으로 섬세해지고 정서적으로 깊이를 가지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의 텍스트는 전체 26행으로 이어지면서 연의 구분을 하지 않고 있다. 시적 화자가 전체적인 시상의 흐름 속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대상은 새악시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악시는 동네 처녀들이 아니다. 마을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새 색시들을 말한다. 칠월 백중날 새악시들이 한껏 모양을 내고는 약물터로 나가는 모습과 장터를 이루며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 흥겹게 그려진다.

시의 텍스트는 시적 의미의 전개 과정으로 볼 때 모두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시적 진술 자체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하는데라는 연결 어미로 이어진 부분이 각 단락을 경계를 자연스럽게 표시한다. 첫 단락은 1행에서부터 3행까지로 이어진다. 힘든 농사일을 견디기 위해 개장 취념을 서너 번 하고 나면 칠월 백중(百中), 음력 7월 보름날이 된다. 여기서 개장 취념이란 개장국(지금은 보신탕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을 끓여 먹기 위해 몇몇이 그 비용을 나누어 내는 일을 말한다. ‘취념은 추렴(出斂)에서 온 말이다.마을에서 논에 모내기를 한 후 세 벌 김을 다 매고 나면 백중날이 된다. 지방에 따라 풍습이 다르지만 바쁜 농사일을 하루 쉬면서 사람들이 함께 여러 가지 음식을 해 나누어 먹으면서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머슴들에게 새 옷을 해 입히고 용돈을 나누어 주고 하루 잘 쉬며 놀도록 해준다. 시의 텍스트에서는 백중 좋은 날이 슬그머니 오는데라고 서술하고 있다.

둘째 단락은 4행부터 11행까지 백중날 새악시들이 한껏 멋을 내어 나들이옷을 차려 입고 약물터로 놀러 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칠월 백중이라는 세시풍속의 내용과 함께 여성들의 복식까지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여기서도 11행은 약물터로 가는데라고 끝이 난다. 백중날 약물터에 놀이를 나가는 새악시들의 옷치레부터 수선스럽게 묘사된다. 무릎 아래에 닿을 정도로 껑충하게 짧은 치마에 자줏빛 옷고름이 길게 느러진 적삼을 입고 있다. 그런데 그 치마는 천진푀 치마라고 한다. 중국 천진(天津)에서 생산된 고급 베(천진포)로 만든 치마를 말한다. 새악시들이 입고 있는 적삼은 쇠주푀 적삼이다. 이것도 중국 소주(蘇州) 지방에서 생산된 고급 베(소주포)로 만든 적삼을 가리킨다. 중국과 물산 교류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머리에는 새로 댕기를 드렸고 발에는 네날백이 따배기신(짚신)을 새로 내어 맨발에 신고 있다. 치마와 적삼, 댕기 머리에 따배기신을 묘사한 부분은 서로 대구(對句) 형식으로 이어진다. 새악시들이 평상시에 입는 치마는 그 길이가 발등으로 내려올 정도로 짧은 물팩치기’(치마의 단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짧은 치마)이다. 한 여름 나들이옷이니 치마의 길이가 짧다.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에 따배기신을 신은 모습이 더욱 가볍게 느껴진다. 당시 농촌의 젊은 여성들의 차림새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셋째 단락은 12행부터 18행까지로 이어진다. 약물터로 가는 과정을 묘사한 대목이다. 무더운 날씨이지만 들길에 가끔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노리개를 붙이고 허리에는 주머니를 찼는데, 그 속에 돈이 들어 있다. 고개를 넘어 약물터에 도달한다. 넷째 단락은 19행부터 22행까지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약물터의 광경을 묘사한 대목이다. 오랜만에 친정집 식구들도 만난다. 여기 등장하는 붕가집이라는 말은 평안도 방언이다. 흔히 가까운 친척집을 가리키는 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면 이 말은 친척집이 아니라 친정집을 뜻한다. ‘친가또는 본댁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시집온 후 오랜만의 나들이에서 친정집 식구들을 만났으니 서로 반가울 뿐이다. 함께 음식도 사먹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중에 갑작스런 소나기가 내린다. 소나기에 옷이 후줄근하게 젖었지만 마음은 즐겁다. ‘호주를하니라는 말은 비에 젖어 옷이 후줄근하게 되어버린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이 시는 새악시가 친정집에 가는 장면으로 시상을 마감하고 있다. 농삿일이 좀 한가로워졌기 때문에 시집살이에서 벗어난 새악시는 친정에 갈 수 있게 된다. 친정에서 보름 가까이 지내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비에 젖은 옷이 오히려 시원하다고 여긴다. 이 마지막 단락의 서설 내용을 보면 시에 등장하는 새악시라는 말이 처녀애가 아니라 갓 시집온 새아씨임을 알 수 있다. ‘붕가집이라는 말을 친척집, 친구네집, 등으로 해석한 경우도 있지만 마지막 단락의 꿈에도 못 잊는 붕가집으로 가면서도 중요한 농삿일들이 끝났으니 평안하게 집살이를 할 것이라는 설명을 보면 봉가집이 친정집 곧 본가집을 뜻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두드러진 특징은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의 감각성과 사실성이다. 이 같은 기법은 다양하게 선택된 제재 속에서 민중의 진솔한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기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시에서는 각각의 시행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듯한 서술적 효과를 드러내도록 잇달아 있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적 진술의 묘사적 설명 방법은 시적 이미지들을 공간적으로 병치시키면서 동시에 그 공간 자체를 한 폭의 이야기로 꾸며낸다. 이 시가 이야기조의 서술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경과를 절묘하게 결합시키면서 시적 대상을 그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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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에서 볼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대체로 고향의 토속적인 풍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은 고향이라는 공간과 갖가지 풍물에 대한 체험이 그만큼 시인의 의식 속에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 시적 공간으로서의 고향은 어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과거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회고 취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추구되고 있는 삶의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백석은 고향의 풍물과 토속적인 인간미를 그의 시를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서 현실의 삶 가운데 훼손된 인간적 가치와 그 회복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백석의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평북 정주 태생으로 1929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조선일보 신년 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된 후 조선일보사가 후원하는 장학금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대학 영어사범과에서 수학했다. 1934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발간하게 된 월간 종합잡지 조광(朝光)의 창간 작업에 참여하였다.

1935830일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한 후 본격적인 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면서 주막, 여우난골족등의 시를 잇달아 발표하였다. 1936년 자가본으로 시집 󰡔사슴󰡕을 한정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 수록한 작품들은 대체로 시인의 고향인 평안도 지역의 풍습을 소재로 하여 소박한 민중의 삶과 거기에 깃들여 있는 토속적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이 해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다. 1938년까지 함흥에서 생활하는 동안 고야, 남행시초(연작), 함주시초, 바다등을 발표하였으며, 교직을 사임하고 경성으로 돌아온 뒤 산중음(연작), 석양, 고향,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등을 남겼다. 1940년 만주 옮겨가서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창씨개명의 압박이 계속되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1942년 만주 안둥[安東] 세관에서 일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목구, 북방에서」 「귀농, 국수, 흰 바람벽이 있어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백석은 고향인 평안도 정주로 돌아왔다. 1947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러시아 문학을 번역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이 무렵 시 적막강산,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등이칠월 백중과 함께 친구인 소설가 허준의 주선으로 서울 문단에 소개됨으로써 그의 건재함이 널리 알려졌다. 1949년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을 번역 출간한 후부터 소련 문학의 번역 작업에 몰두하였다.

한국전쟁 뒤에도 백석의 활동이 이어진다. 1956년 조선작가동맹 기관지 문학신문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었고 아동문학편집위원을 맡았으며, 1957년 동시집 󰡔집게네 네 형제󰡕를 정현웅의 삽화를 넣어 간행하였다. 1959년 양강도 삼수군의 국영협동조합에서 일하면서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