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와 여러 편의 소설 원고들을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심재호(심훈의 3남) 선생의 호의로 그 사진 자료들을 받았다.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는 193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검열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한 채 숨겨졌었다. 그리고 심훈 선생이 작고(1936)한 후 광복을 맞으면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친필 원고들은 지난 2000년 <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이 출간된 후 그 후속작업으로 계획했던 작품 원고의 영인본 출판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지금 이 원고들은 모두 심재호 선생이 미국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다.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를 보면, 누렇게 변색된 얇은 표지에 《심훈시가집(沈熏詩歌集)》 제1집이라는 제목이 선명하다. 아마도 이 시집이 식민지 시대에 계획했던 대로 발간되었다면, 그 제목은 《심훈시가집》이 되었을 것이다. ‘1919-1932’라는 글자는 수록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를 말해준다. ‘경성 세광사 인행’이라는 표식으로 보아 이 원고를 세광사에서 발행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시집은 계획대로 발간되지 못했다. 단아하게 써내려간 펜글씨의 제목 바로 옆에 ‘治安妨害(치안방해)’ ‘一部分削除アリ(일부분삭제함)’이라는 붉은 글씨의 도장이 무섭게 찍혔다. 그리고 그 밑으로 삭제된 곳에 복자(伏字)나 ‘ㅇ’ 자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삭제된 곳을 빈칸으로 남겨두어서도 안 되며, 삭제된 곳에 삭제 내용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는 주의사항이 일본어로 붉게 표시되어 있다. 일본 경찰은 이 시집의 원고에 숱한 붉은 줄을 그어놓음으로써 아예 그 발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는 모두 전체 19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의 순서를 따라가면 서시(序詩)로 수록된 「밤」에 이어 모든 수록 작품이 <봄의 서곡> 14편, <통곡 속에서> 7편, <짝 잃은 기러기> 13편, <태양의 임종(臨終)> 8편, <거국편(去國篇)> 7편, <항주유기(杭州遊記)> 14편 등 전체 6부로 나뉜다. 그리고 총 64편의 끝에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붙어 있다. 이 마지막 글은 1919년 3.1운동 당시 심훈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적었던 것이다. 단순한 서간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서간체 산문시로 읽을 수 있다. 이 원고의 첫머리에 ‘나는 쓰기를 위해 시를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머리 말씀’이 가슴을 친다. 뒤로 이어지는 글귀를 옮겨보면 이렇다. ‘삼십이면 선(立)다는데 나는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덧 내 몸이 사십의 마루터기 위에 섰습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염없게 생명이 좀 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나는 이 시집의 원고자료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그 유명한 시 「그날이 오면」을 찾아보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시학교수였던 바우라(C. M. Bowra)는 《시와 정치》(1966)에서 시인의 개인적 열정과 그 단순성이 얼마나 커다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 「그날이 오면」을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바우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시인은 독일 시인처럼 포악한 현실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일지라도 감격적인 미래가 일깨우는 격렬하고도 숭고한 그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우라 교수는 이 시에서 그려낸 감격의 장면을 놓고 사람과 자연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환희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서구의 저항시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감동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서구인들에게 이렇게 수준 높은 안목을 통해 소개된 적은 없다.
시 「그날이 오면」은 전체 원고에서 제1부 <봄의 서곡> 가운데 여덟 번째 작품(원고 32면)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원문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대부분의 다른 시들이 모두 원고지에 펜글씨로 적혀 있는 데에 반하여 이미 인쇄된 책의 한 페이지가 그대로 오려 붙여져 있다. 이 시가 어떤 잡지에 이미 발표되었던 적이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시 「그날이 오면」이 일제 식민지시대 잡지에 발표 수록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심훈 선생이 시집 발간을 시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검열로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원고를 보관했고, 선생의 사후에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인쇄된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단장(斷腸) 2수(首) -구고(舊稿) 중(中)에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전(前)에 와주기만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저 산산(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자리에 꺽구러저도 원(願)이 없겟소이다.
앞의 인용대로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원제가 「斷腸二首」였다. 심훈 선생은 시집의 출간을 계획하면서 이 제목을 ‘그날이 오면’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舊稿中에서’라는 부제는 아예 빼어버렸다. 작품의 본문 가운데에는 제2연의 마지막 행 종결구인 ‘願이 없겟소이다’를 ‘눈을 감겟소이다’로 바꾸었다. 이런 식의 부분 개작을 통해 시 「그날이 오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의 제목의 교체와 마지막 한 구절의 변화를 통해 이 시는 ‘그날’을 맞이하는 순간의 기쁨이라면 죽음과도 바꿀 수 있음을 처절하게 노래한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전문이 검열에 의해 모두 붉은 줄로 지워지고 <삭제(削除)> 당한다. 이미 잡지에 발표된 적이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이 작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검열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시 「그날이 오면」의 원문이었던 「단장(斷腸) 2수(二首)」는 언제 어디에 발표한 것일까? 이 작품의 집필시기(또는 발표시기)를 말해주는 작은 단서는 앞의 잡지면 위에 희미하게 연필로 표시되어 있는 ‘1930. 3. 1’이라는 글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발표 수록한 것이 어떤 잡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1930년 3월 1일 이후부터 이 시집 발간을 계획했던 1932년 9월(‘머리 말씀’의 말미에 표기된 날짜) 사이에 발행된 어떤 잡지였을 것이다. 지난 일년 가까이 틈나는 대로 나는 이 시기의 잡지를 뒤졌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 잡지 가운데 제대로 보관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흩어진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심훈 선생의 친필 원고들을 소중히 보관해 오신 미국의 심재호 선생은 이 자료들을 모두 국내로 들여와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계시다. 심훈 선생의 <필경사>가 있는 충남 당진에 자료관 또는 기념관을 제대로 짓고 거기에 보존하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심재호 선생이 내게 알려온 소장 자료 목록 가운데에는 장편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 등의 친필원고와 단편 「황공의 최후」의 친필 원고가 있다. 그리고 소설 「상록수」 영화각본과 영화소설 「탈춤」의 각본도 보관되어 있다. 심훈 선생이 직접 각색, 감독, 촬영하고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촬영 원본도 있고, 선생의 절필 「오오 조선의 남아여」가 붓끝에 살아남아 있다.
나는 이 자료들이야말로 한국 현대문학 최대의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어떤 작가나 시인의 경우에도 이렇게 많은 친필 원고를 고스란히 보존해온 경우가 없다. 이 자료들을 잘 지켜오신 심재호 선생께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한국문학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소중한 자료들을 떳떳하게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널리 보여주고 아픈 상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 책임이 막중하다. 올해는 100년 전 일본 강점을 되돌아보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는 터라서 이 자료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심훈 선생이 살아 생전에 글을 쓰셨던 <필경사>의 관할 지역인 충남 당진군의 전(前) 군수가 비리 혐의로 수사대상이 되자 위조 여권을 들고 국외로 도피하려다가 붙잡혔다는 뉴스가 코미디 프로에서까지 풍자되고 있다. 이런 작태의 주인공이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이 되어 농단을 부리고 있는 동안 <필경사>는 낙후되고 그 주인이 남긴 피맺힌 원고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해외에서 떠돈다. 이 친필원고들을 국내로 모셔와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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