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은 C군이 전화를 해왔다. 연말이 되기 전에 나를 한번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대학 연구소에서 계약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의 전화에 나는 그저 민망할 뿐이다. 그러나 저녁이라도 사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약속 날짜를 잡았다.
나는 C군의 대학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다. 내가 담당했던 강의에서 첫번째 리포트에 A+를 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 C군은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면서 전공 문제를 내게 상의하였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시작하였다. 제 발로 고생길에 접어든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부지런하게 공부를 해서 교수들의 칭찬을 자주 들었던 C군은 대학원에서도 착실하게 자기 연구에 몰두했다. 석사과정에 적을 두고는 군대를 끝냈고, 석사 논문도 꽤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주목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결혼도 했다. 내가 주례를 맡았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색시를 들이게 된 C군의 형편을 생각하여, 나는 좀 과하다싶게 주례사에서 신랑 자랑을 늘어놓았다. 곧 박사가 될 것이고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라고 했던가? C군은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이 훨씬 넘은 삼십대 후반에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벌써 결혼 생활도 5년이 지났고,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러나 박사학위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끔 찾아가는 한정식 집에서 C군을 만났다. C군은 큰 가방을 들고 넥타이까지 맸다. 일주일에 한 차례 지방 대학에 출강을 하고 있는데, 성적 처리 때문에 내려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힘들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여간 죄스럽다는 표정이다. 지난 한해도 교수님께 걱정만 드렸어요. 제대로 취직을 못하고... C군은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 잇는다.
박사학위를 받고는 바로 취직이 될 것으로 모두들 기대를 했지요. 계약제 연구원으로 2년을 보냈는데 그나마 연구프로젝트가 모두 끝나는 바람에 재계약은 없다고 하네요. 내년에는 강사 자리를 두어 군데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은 강사료가 박하지는 않아서 그럭저럭 작은 살림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고, 해마다 두세 편씩 논문도 발표하였지요. 제 깐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지난 일 년 동안은 지원서조차 낼 곳이 없었어요. 계약제 강의교수는 강사 노릇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전임 자리는 전혀 보이지 않네요.
C군의 말에 힘이 없다. 나는 C군의 손을 잡는다. 교수님 댁과 마찬가지로 저도 부양가족이 셋이나 되는 가장이 되었어요. 이제는 처가 식구들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아서 아내에게 늘 미안하지요. 나는 C군에게 맥주 한잔을 권한다.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자에게 나도 그저 미안할 뿐이다.
내년 일 년이 지나면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나는 다시 C군의 맥주잔을 채운다. 공부한다는 것. 언제나 그랬어. 사실은 언제나 전망이 밝았던 것은 아니야. 내가 대학원을 다녔던 70년대를 생각해 보면 똑똑하고 재바른 친구들은 모두 사회로 빠져 나갔지. 좀 우둔하고 느린 자들이 연구실 주변에 남아 있었어. 그래도 한 가지 자존심은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겠는가? 학문이란 것- 나 자신이 그것을 좋아서 택했다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일생동안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네. 자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네. 공부... 자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 누가 무어래도 당당히 할 수 있지?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대학교수는 그렇게 상위의 직종은 아니야.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계약제 조교수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종신제 교수직을 얻지 못하면 그걸로 끝나지. 그래도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지. 그 이유가 뭔지 알겠나?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나는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마음이 걸린다. 사십 줄에 가까이 들어선 박사 제자에게 환갑이 지난 선생이 할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속으로 그저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하고 되뇌일 뿐이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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