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혐오(嫌惡)의 정치론을 내세운 바 있는 영국의 허버트 리드는 “문화라는 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눌러대서는 안된다. 그것은 밑에서부터 자라 올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문화의 자율성을 말할 때마다 리드가 말한 이 한 마디의 충고가 생각난다.
문화라는 것은 사실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얽매여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규정된 방향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변화하는 시대와 변화하는 인간의 삶에 다라 함께 변화하는, 살아있는 사회적 현상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인간 생활양식의 총체라고도 한다. 인간이 자신의 살메 근거하여 현실을 바라보고, 생을 영위하며, 우주만물을 대하는 일체의 행위가 문화를 형성한다고 한다.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것도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며, 문화의 자율성이라는 것도 바로 여기서 연유되는 것이다.
요즘 경제의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크고 작은 갖가지 문화 행사가 치러지고 있다. 그러나 차분하게 우리 문화의 진로를 모색해 볼 수 있는 반성적인 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류를 이야기하고 한식을 내세우는 요란스런 겉치레의 문화 행사들이 많았지만,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기는 어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선진 문화를 내세우고 있는 요란스런 구호에 비해 오히려 문화 영역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인 배려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문화부를 만들었는데, 문민정부 이후 거의 20년이 지났음에도 오히려 문화가 정치의 뒷전으로 밀려났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식의 주장이 당연히 제기되고 논의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숨겨진 또다른 문제성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화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는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우리 문화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은 되지 못한다. 문화를 정부가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며, 사람들의 요구와 행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과 이해와 요구와 행동이 모두 다르고, 그 가치 기준이 다른 것처럼, 문화의 양상도 달라지며, 그 방향도 일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인식 체계 전체를 문화의 범주 속에 넣을 수 있다면, 문화는 일종의 의미의 영역이면서도 상징적인 형식의 영역이 된다. 그리고 문화 속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가 규정되며, 문화를 통해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성립된다.
문화는 개인적인 욕구에서부터 사회적 질서에 대한 신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의 가치와 규범을 드러내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기능을 지닌다. 인간은 어느 시대에서나 그 시대의 문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위치를 규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오고 있다. 문화는 결국 모든 사회 현상과 불가분의 복합체이며, 그 사회의 역사적 조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문화는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여 왔다. 분열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작된 문화의 분열도 우리는 체험했고, 이념의 양극화 현상에 의해 빚어진 문화의 갈등도 경험한 바 있다. 우리 사회는 경제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적 변화에 새로운 의미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문화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였다. 이것은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갈등이 문화적 통합을 기하지 못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는 점과도 직결된다.
우리 사회가 개방적인 국제 질서를 선택하고 다원화된 지식정보 사회로의 발전을 추구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발전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이 필요하다. 지난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겪어야 했던 모순과 갈등을 벗어나삶의 가치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질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역동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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