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다(Leda)와 백조
폼페이에서 발견한 벽화
이태리 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고대도시 폼페이(Pompeii)는 화산재 아래 묻혀 있던 곳이다. 2천년 전인 서기 79년 폼페이에서 약 23 km 떨어진 베수비오 산(Mount Vesuvius)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베수비오 산은 오랜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이 사화산처럼 서 있던 산이었다. 화산 폭발이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폼어나왔다. 그리고 그 화산재가 그대로 인근의 도시 폼페이를 덮쳤다. 폼페이는 약 7m에 달하는 화산재에 덮인 채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16세기 말에 그 존재가 발견되었고 그 후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발굴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곳 폼베이에서 고대 로마 시대의 관능적인 벽화가 발견돼 고고학계가 탄성을 터뜨렸다. 폼페이 유적 지구의 구조 보강 작업 도중 백조의 형상을 한 주피터 신이 스파르타의 여왕 레다를 임신시키는 장면을 생생히 묘사한 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폼페이 유적지의 한 저택의 침실 벽에서 발견된 이 벽화는 약 2천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색감과 레다 여왕의 관능적인 표정이 살아있어 발견자들을 놀라게 한 것으로 전해졌다. 백조로 변신한 주피터 신이 레다를 임신시킨 이야기는 당시 폼페이에서 주택 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희랍 신화 속의 ‘레다와 백조’
희랍의 신화 가운데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Leda)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레다는 제우스신의 쌍둥이 아들 디오스쿠리(Dioscuri)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왕비 레다를 약칭하여 ‘디오스(Dios)’라고 한다. 디오스의 여신이라고도 부른다. 레다는 원래 스파르타 왕 틴다리오스(Tyndareos)의 왕비이며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녀는 에우로타스(Eurotas) 강에 나아가 자주 목욕을 한다. 올림포스에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던 제우스가 이 아름다운 미녀의 자태를 보고 마음을 태운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함부로 하기는 어렵다. 제우스는 때를 기다린다. 마침 레다가 작은 연못가에서 목욕하는 모습을 본 제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술수를 부린다. 레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곁으로 갑자기 하늘에서 백조 한마리가 날아든다. 그리고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백조를 잡아먹기 위해 주위를 맴돈다. 백조는 독수리를 피하기 위해 허둥댄다. 레다는 백조를 가엾게 여겨 자기 품에 꼭 안아 숨긴다. 레다가 백조를 품은 사이 백조는 강폭한 사내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레다를 범하게 된다. 여기서 백조는 제우스의 변신이고, 독수리로 가장한 것은 제우스의 아들 헤르메스다. 아들 헤르메스가 아버지의 욕심을 돕게 된 것이다.
얼떨결에 제우스와 일을 치른 그날 밤, 레다는 남편인 스파르타의 왕 틴다리오스와 잠자리를 갖은 후에 임신한다. 얼마 뒤에 그녀는 사람 대신 알을 두 개 낳는다. 그 두 개의 알에서 각각 남녀 1명씩 2쌍의 쌍둥이가 태어난다. 한쪽은 제우스의 자식이요, 다른 한쪽은 인간 틴다리오스의 자식이다. 제우스의 알에서 태어난 자식은 헬레네와 오빠인 폴룩스(폴리데우케스). 틴다레오스의 알에서 태어난 자식은 클리템네스트라와 오빠 카스토르이다. 이 가운데 남자 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룩스를 ’디오스쿠리‘ 즉 제우스의 아들들이라고 부른다.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 신를 끌어안고 있는 왕비 레다의 모습은 수많은 미술품으로 만들어져 전해온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레다와 백조>는 그 가운데에서도 유명한데, 이번에 발견된 벽화와 그 모티프가 아주 유사하다.
시인 예이츠의 <레다와 백조>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William B. Yeats)는 그의 시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에서 제우스 신과 왕비 레다의 관계를 말해주는 그리스 신화를 시적으로 변용하여 이렇게 그려낸다.
갑자기 덤벼들어; 백조는 큰 두 날개를 조용히 치며
비틀거리는 여인 위에 덮친다, 여인의 허벅다리는
새의 어둔 깃가지에 쓰다듬기고, 목은 주둥이에 잡혀,
어찌할 수 없이 여인의 가슴은 백조의 가슴에 껴안긴다.
공포에 사로잡혀 얼빠진 손가락이 어떻게 맥 풀린 허벅다리에서
깃에 싸인 그 영광을 밀어젖힐 수 있겠는가.
백색의 급습(急襲)에 내맡긴 육체가 그 품안에서
이상히 가슴 울렁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후략)
A sudden blow: the great wings beating still
Above the staggering girl, her thighs caressed
By the dark webs, her nape caught in his bill,
He holds her helpless breast upon his breast.
How can those terrified vague fingers push
The feathered glory from her loosening thighs?
And how can body, laid in that white rush,
But feel the strange heart beating where it lies?
이 시를 소개하고 있는 한 영문학자(이창배, 20세기 영미시의 이해, 24-26면)의 해설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레다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가 레다를 범한다. 이것은 신이 인간의 세계로 하강하여 인간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신인교섭(神人交涉)’의 모티프로 고정되어 이야기 속에 전해지게 된다. 예이츠는 이 신화의 한 장면을 그의 시 속에 끌어들여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그리스의 문명이라는 것이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신과 왕비 레다의 교섭의 장면에서 시작된다고 본다. 이 신과 인간의 육체적 교섭은 그리스도의 수태고지(受胎告知)와 맞먹는 중대한 역사적 순간이다. 예이츠가 이 극적인 장면을 시적 상상력으로 포착하여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담아낸 셈이다.
이상의 소설 「동해(童骸)」 속의 ‘디오스의 여신
우리 문학 가운데에는 이상(李箱)의 소설 「동해」에서 그리스 신화 속의 ‘디오스의 여신’인 레다의 이야기가 패러디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 장면은 눈이 밝은 독자가 아니고서는 찾아내기 어렵다. 소설 「동해」의 이야기는 요즘의 풍속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특이한 남녀관계를 그려낸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나’라는 인물은 작가 이상 자신으로 위장하면서 일종의 ‘메타픽션’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어느 날 오후 ‘나’ 혼자 살고 있는 단한칸 방으로 ‘임’이라는 여인이 가방을 싸들고 찾아온다. ‘나’는 이 여인의 남편인 ‘윤’이라는 사내와 서로 알고 지내는 친구이다. ‘임’이 남편과 사소한 다툼 끝에 집을 뛰쳐나와서는 남편 친구인 ‘나’를 찾아온 것이다. ‘임’은 ‘윤’과는 못 살겠다면서 ‘나’에게 한번 같이 살아보잔다. 이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나’는 ‘임’을 내치지 못하고 하룻밤을 같이 보낸다. 그리고 이튿날 그녀를 데리고 ‘윤’에게 찾아간다. ‘나’는 ‘윤’을 나무라면서 그 아내인 ‘임’의 행동을 설명한다. 그러는 사이에 ‘나’와 ‘윤’과의 사이에 약간의 언쟁이 벌어진다. 이때 ‘임’이 자신을 ‘디오스의 여신’이라면서 두 사내의 언쟁 사이에 끼어든다.
“지이가 디오스의 여신(女神)입니다. 둘이 어디 모가질 한번 바꿔 붙여 보시지요. 안 되지요? 그러니 그만들 두시란 말입니다. 윤한테 내어준 육체는 거기 해당한 정조(貞操)가 법률처럼 붙어 갔던 거구요, 또 지이가 어저께 결혼했다구 여기두 여기 해당한 정조가 따라왔으니까 뽐낼 것두 없능거구, 질투헐 것두 없능거구, 그러지 말구 겉은 선수끼리 악수나 허시지요, 네?”
윤과 나는 악수하지 않았다. 악수 이상의 통봉(痛棒)이 윤은 몰라도 적어도 내 위에는 내려앉았는 것이니까. 이것은 여기 앉았다가 밴댕이처럼 납작해질 징조가 아닌가.
여기서 ‘임’이 언급하고 있는 ‘디오스의 여신’은 물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말한다. 「동해」의 여주인공 ‘임’은 하룻밤 사이에 남편 ‘윤’과 ‘나’를 번갈아가며 관계한 셈이다. 그녀는 신화 속의 디오스 여신, 즉 스파르타 왕비 레다가 백조로 변신했던 제우스와 관계를 맺고 다시 그날 밤 스파르타의 왕 틴다리오스와 관계했던 사실을 자신의 입장으로 바꾸어 패러디한다. ‘임’은 자신을 ‘디오스의 여신’이라고 자칭하면서 ‘나’와 ‘윤’의 언쟁을 말린다. 이 대목이야말로 「동해」의 텍스트에서 여주인공의 성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임’은 자신의 얼굴에 ‘디오스의 여신’을 덧씌우고는 두 사내 사이를 오가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정조’를 내세워 이들을 납득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소설 속의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임’이 ‘디오스의 여신’이라면 도대체 누가 제우스이고 누가 스파르타의 왕 틴다리오스일 수 있겠는가?
소설 「동해」는 여주인공 ‘임’의 일탈을 통해 여성에게 요구해온 정조(貞操)의 관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그것은 도덕이라든지 윤리적 가치라든지 하는 것이 모두 상대적일 수밖에 없음을 말하기 위한 고도의 수사적 장치를 읽어내야만 접근이 가능하다. 소설의 제목 자체도 ‘처녀와 헌 게집’이라고 풀이할 수 있는 ‘동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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