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소확행(小確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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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그의 수필에 만들어 썼던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널리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말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지만 일본어사전에 올라 있는 말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 낸 신조어(新造語)이기 때문이다.
‘소확행’이라는 말은 1986년 일본 광문사(光文社)에서 발간한 하루키 수필집 <랑겔한스섬의 오후 (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에 처음 등장한다.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어 말아둔 깨끗한 팬티가 가득 쌍ㅎ여 있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작기는 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하나’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는 ‘小さいけれども確かな幸せ(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을 그는 줄여서 ‘소확행[小確幸, しょうかっこう]’이라고도 썼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을 책의 표지에 노출시켜 광고한 것은 그가 1996년 5월 신조문고(新潮文庫)로 펴낸 수필집 <うずまき猫のみつけかた>이다. 이 제목을 무어라고 번역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는 표지에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문구를 줄임말로 쓰지 않고 그대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 수필집은 하루키가 미국 하버드대학이 자리잡고 있는 보스턴 근처의 케임브리지에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체류했던 체험기를 중심으로 하여 적은 것이다. 당시 하루키는 보스턴 마라톤에도 직접 참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에서도 ‘생활 속에 개인적인 소확행(비록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찾기 위해서는 다소간 자기 규제 같은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주 심한 운동한 후에 찬 맥주를 마시면서 음, 맞아, 이것이다 하고 혼자서 눈을 감고 무심코 중얼거리는 그런 감흥이라든지...’하는 구절이 본문 속에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소확행이라는 말은 벌써 수년전에 타이완에서 굉장히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타이완에서 이 말이 유행한 것은 2014년 무렵이다. 타이완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가 우리나라 못지않게 많기 때문에 하루키가 만들어낸 이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 말은 타이완에서 먼저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유행어가 되었다. 그러자 책의 이름, 상품의 광고, 심지어는 회사의 이름까지도 ‘소확행’을 쓸 정도가 되었다. 급기야 타이완 총통 선거 중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연설도 등장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가운데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하도록 만드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시대적 요구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제는 소확행이 아니라 ‘대확행(大確幸)’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까지 만들어냈다.
우리나라에는 ‘소확행’이라는 말을 문학사상사가 일찍 소개한 바 있다. 문학사상사에서 2001년에 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은 그 제목 자체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한 바퀴를 돌아 타이완에서 유행하다가 지금은 한국사회의 새로운 트렌드를 대변하는 말처럼 굳어지고 있다. 2018년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 ’대한민국 소비 트렌드를 나타내는 말로 이 말을 지목했다고 크게 보도한 바 있다. 물론 이 말과 함께 ‘미닝아웃(Meaning out, 소비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신념을 표현하는 행위)’, ‘케렌시아(Querencia, 일상적 삶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나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 등도 거론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도 여전히 ‘소확행’이 여기저기서 화제거리로 등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심지어는 소비 트렌드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삶의 자세나 가치관을 말해주는 용어로 확대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일본의 언론에서조차도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확행’이 한국사회의 현실적 단면을 보여주는 키워드가 되었다고 보도할 정도다. 젊은 세대가 취직하기는 어렵고 돈벌이도 쉽지 않아서 삶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의 만족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설명도 그럴듯하다.
실제로 최근의 한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소확행’ ‘워라벨’ ‘욜로’ 등의 신조어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말해주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소확행’은 물론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인데, ‘워라벨’은 ‘일(work)’과 ‘삶(life)’의 ‘조화(balance)’를 뜻하는 영어 단어를 합하여 하나로 줄여놓은 신조어다. ‘욜로’라는 말은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를 뜻하는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따서 줄여놓은 말이다. 현재의 자기 삶에서 느끼는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여 소비하는 태도를 뜻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지장으로 주거나 영향을 받지도 않고 자기만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취업포털 커리어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요즘의 젊은 구직자들이 ‘소확행’(51.8%) ‘워라벨’(30%) ‘욜로’(18.2%) 등의 순으로 자신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패턴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근래 흔히 ‘삼포세대’로 불리기도 하는 한국 젊은 세대들이 성취가 불확실한 취업,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같은 큰 행복을 좇기보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찾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에서 거창한 목표나 꿈을 접어버리고, 불확실한 행복을 좇기보다는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이 강해졌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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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무리카미 하루키는 전 세계에 수백만의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이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렇게 명성을 얻게 된 과정은 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가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던 때만 해도 일본의 평단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아주 인색했다. 일본 문단은 하루키의 소설을 그저 한때 대중 독자들의 인기를 모으는 통속적인 소설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문학사상사를 중심으로 일찍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는 태도에 대해 일본 출판계도 의아스러워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비롯하여 <해변의 카프가> <태엽 감는 새> <댄스 댄스 댄스> 등이 잇달아 출간되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세대를 사로잡았고 그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때마침 한국 문단은 1980년대까지 이어왔던 역사와 현실을 중시하는 소설의 이른바 ‘거대담론’이 정치 사회적 민주화의 확립 과정 속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주도했던 젊은 계층은 개인적 삶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전 세대와 달리 정치사회적 민주화를 통해 개인적 삶의 질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독자들이 만나게 새로운 소설적 세계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한국의 소설에서 흔히 만났던 인물의 사회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던 여러 가지 징표들이 모두 지워져 있다. 오히려 일상적 삶의 현실 자체가 인물의 성격을 해체한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인물은 그 개인적 존재와 삶의 현실 사이에 애매한 긴장이 가로놓여 있지만 대체로 그 사회적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예컨대 <상실의 시대>에는 30대 중반을 넘어선 사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나’라는 주인공이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안에서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거의 20년이 지나버린 19살 때의 나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첫사랑의 아득한 기억과 그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지는 것들은 사랑의 아픈 실패와 친구의 자살 등으로 회색빛으로 바뀌어버린 젊음 시절의 풍경이다. 이 소설에서 감촉되는 도시적 감각,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내적 고뇌, 청춘의 방황과 아픈 사랑 등에는 역사라든지 현실이라든지 하는 시대의식 자체가 담겨져 있지 않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지극히 파편화된 개인들이며 이들이 겪는 삶의 허무감이 소설의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계문학의 무대로 끌어올린 <태엽 감는 새>는 직장을 그만 둔 사내를 화자로 등장시켜 놓고 있다. 그는 도쿄 교외에 있는 집에서 아내가 일하러 나간 사이에 하루 종일 혼자 뒹군다. 1930년 이상의 소설 <날개>의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이 소설의 이야기는 부조리한 사건들이 이어지면서 주인공의 삶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소설에서는 개인의 삶의 사회적 조건을 어느 정도 규제해온 가정이라는 사회단위가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직장을 벗어나고 가정으로부터 유리됨으로써 기성적 질서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적인 인물 설정은 소설적 서술의 기법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우선 행위의 인과적 논리가 철저하게 거부되고 있으며, 구성의 원리라고 하는 고전적인 소설적 규범도 무너지고 있다. 상황의 끊임없는 변화와 그 내밀성을 천착하기 위해 이야기는 해체되고, 잡다하게 변화하는 현실의 임의적인 환상들이 닥치는 대로 그려진다. 소설속의 이야기는 모두 단편적인 것이 되고 행위는 연속성을 벗어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보여주는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경험적 현실 세계의 다층성과 가변성, 그리고 그 불연속적인 자의성을 드러내기 위한 고안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력의 전환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산업화 과정과 민주화 운동을 추동했던 거대서사의 소멸이라는 소설적 변화와 맞물리면서 크게 충격을 던져준다. 하루키 열풍이 일어나게 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소설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주제의식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 동안 이미 독자들은 하루키의 소설의 새로운 상상력과 그 기법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이후 지난 30년 동안 2, 3년에 한두 편씩 화제의 작품들을 줄곧 내놓았다. 소설가로서 끈질기게 글을 쓰는 일로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입증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독자 대중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자신만의 다양한 취미활동도 꾸준히 실천한다. 직업으로서의 작가라는 위치를 잠시도 잊지 않고 그는 자신을 조련하고 있다. 자신의 체력을 위한 스포츠 활동, 세계의 여러 지역에의 여행과 그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 음악에 대한 폭넓은 이해,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와 술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는 적당하게 어물적 넘기는 법이 없이 언제나 전문가답게 자신을 보여준다. 이 같은 소설가로서의 프로 근성과 끈질긴 탐구력은 세계의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장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설에서는 그가 동원하고 있는 모든 소재와 대상이 풍부한 이야기거리로 살아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오랜 전통 속에서 소설의 양식이 추구해온 서사의 문법을 자신의 방식으로 고쳐놓고 있다. 그는 과거의 소설이 집착했던 방식대로 인물을 통한 사회 역사적 특수성의 발견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본인’이라고 성격지워 말하기 어려운 특이한 개성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비록 일본인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세계화시대를 살아가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구태여 그들에게 어떤 지역성을 언급해야 한다면 ‘세계인’이라는 명명이 오히려 더 설득적일 수가 있다. 그들의 삶의 태도나 사고방식은 뉴욕의 어느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젊은이와도 비슷하고 파리의 지하철에서 볼 수 있는 젊은이와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한 젊은이들은 서울의 홍대 앞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러한 개성적이지 않은 ‘특이한 개성’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소설에서 창조해낸 성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미문(美文)의 스타일리스트는 아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하나의 의미를 지탱하기 위해서 그가 발굴하고 있는 흥미로운 소재뿐만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를 고심한다. 화제작이었던 <해변의 카프카>는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듯이 자기 소재를 재해석하여 배치하고 있다. 이 소설의 이야기에서 갈피를 잡아내기 어려운 사건들의 중첩과 충돌, 가족이라는 유대감을 상실한 채 떠도는 인간의 삶의 도정은 궁극적으로 삶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허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질문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어떻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는 그 소설적 미학을 논할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고심하고 있는 ‘어떻게’의 문제는 대상을 파악하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떻게’의 문제는 일상의 소재를 소설이라는 예술의 영역으로 몰아넣는 방법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묘사의 매력보다는 서술의 힘에 의존한다. 일본 소설이 하나의 전통처럼 내세웠던 섬세하고도 예리한 언어 감각과 문체를 하루키는 별로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쉽고 활달하게 서사를 전개시키고 이야기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만들어내고 이를 이어가는 서술에 힘을 기울인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이야기는 특정의 장면이나 특정의 사물에 묘사가 집중되어 이야기의 진행과 흐름이 멎어버리는 경우를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특정 대상에 대한 지배적 인상의 묘사적 표현보다는 다양한 시각의 서술이 이어진다. 결국 소설의 이야기는 어떤 경우 빠르게 어떤 경우는 느리게 진행되면서도 그 장면의 전환을 쉽게 이루어나간다. 이 평이한 문체를 통한 서술의 힘을 바탕으로 하루키는 그가 선택한 소재를 중심으로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는 이야기의 힘을 따라가는 이야기꾼이지 언어의 정교함과 섬세함을 자랑하는 스타일리스트는 분명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특징이 오늘의 세계문학 독자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매료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세계화라는 거대한 전환의 물결 속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지역과 종족과 언어의 경계를 뛰어 넘어서 소설이라는 양식이 거두어들이고 있는 특이한 문화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이 한국 소설에도 기법과 정신의 전환을 새롭게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은 과장된 설명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우리 작가들의 경우 대부분이 하루키 소설에 빚지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대 한국 소설 독자들을 매료시키면서 세계문학의 무대로 도약했으며 한국의 소설도 하루키를 만나면서부터 소설의 방법 자체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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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카미 하루키는 일본 작가이지만 이제 세계적 지성으로 그 목소리를 누구나 경청한다. 그가 두어 해 전에 동아시아의 문화적 연대를 강조하면서 일본과 중국을 둘러싼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 한국과 일본의 독도 문제로 빚어진 분쟁을 두고 했던 말도 다시 생각난다. 그는 ‘영토갈등을 둘러싼 갈등과 그 광적인 반응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의 행동을 닮았다.’ 라고 꼬집으면서 지성의 부재를 논박했다. 하루키는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한국 중국 일본 사이의 문화교류가 ‘문화적 등가교환’임을 천명하면서 이러한 문화 교류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가 시대의 양심으로 세계적 지성으로 존경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정치적 현실 문제를 바라보는 예지(叡智)와 통찰력 때문임은 물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소확행’이라는 말이 타이완에서 유행어가 되고 한국의 젊은이들의 삶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지성인으로서의 말과 행동, 그리고 세계적 작가로서의 놀라운 상상력, 인간과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 등으로 본다면 이런 경향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 삶에서 추구해야 하나의 목표를 말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지는 않다. ‘소확행’이라는 말 자체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상업주의적으로 새로운 의미까지 덧붙여져 부추겨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루키는 일상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작은 행복이란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누리며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니스 코트에서 신이 나게 테니스를 치고 나서 차디찬 맥주를 들이키는 기분이라든지, 샤워를 마치고 포송한 새 내의를 갈아입으면서 느끼는 상쾌한 기분이라든지, 아파트 정원을 걷다가 보도블럭 사이에서 키 작은 노란 민들레꽃이 막 피어난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경이로움 같은 것은 우리가 그 가치를 놓치고 있던 감정들이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소확행’도 바로 그런 것들이다. 갓 구워낸 식빵을 손으로 찢어먹을 때 느끼는 신선하고도 고소한 맛이라든지, 서랍을 열었을 때 새 팬티가 착착 잘 접혀서 가지런히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그런 기분을 그는 ‘소확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이나 기쁨의 감정은 일부러 그런 것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느끼고 즐기는 그런 기분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가 삶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포기하고 ‘소확행’에 집착한다거나 자기들이 이루어낼 수 있는 작은 성취에 민족하면서 살고 있다는 식의 해석까지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오히려 하루키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을 생각하면서 요즘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이 겪는 힘든 삶을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이 아무 대책도 없이 마치 무능력자처럼 사회의 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이다. 이 같은 현상은 매일 같이 귀가 아프도록 들으면서도 뾰족한 방안을 내놓지 못하는 미세먼지보다 더 심각한 과제이고,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는 2차 회담보다 더 중요하다. 이런 문제를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할 정치인들은 여전히 입 바른 소리만 뱉어놓으면서 파당적인 이익만 따지고 말로만 청년 일자리 수만 개를 만들겠다고 큰소리를 친다. 그런 속에서 어두운 현실에 좌절하면서 무기력에 빠져버린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삼포세대’니 ‘오포세대’ 하면서 자기 비하에 빠져들어 있다. 이 환멸의 시대를 스스로 견디어 내는 젊은이들이 참으로 딱하다. 경제가 위기라든지 일자리가 부족하다든지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 해에 수십만의 대졸 학력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이제 와서 취업의 눈높이를 낮추라고 훈수하는 것은 그들을 그렇게 키워낸 사회의 책임 회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젊은 세대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하는 최우선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미래의 한국 사회를 새롭게 이끌어갈 이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와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기성세대의 시대적 임무에 대한 거역이다. 젊은이들이 삶의 꿈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포기한 세대라고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비하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지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우리 사회의 미래는 이들의 손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젊은 세대가 일어설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미래의 주역들에게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고 자기 삶에 대한 권한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어떻게 사회를 떠맡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고 있는 ‘소확행’은 삶의 조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상태에서 일상적 현실의 삶 가운데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자잘한 행복감이다. 우리 젊은 세대가 지금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일상의 소소한 작은 행복이 아니다. 그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생존 자체를 위기로 체감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의 생활 태도라든지 소비 트렌드라는 것을 ‘소확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그 본의와는 너무 다르고 별로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한 끼의 식사조차 라면으로 때우기 일쑤인 이들에게 ‘갓 구워낸 식빵의 고소하고도 신선한 맛’을 느끼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루 종일 고시촌 구석방에 틀어박혀 문제집과 씨름하고 있는 젊은이가 서랍 속에 가득 새 팬티를 가지런히 개어 넣어두고 그걸 꺼내어 입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한가롭게 테니스를 즐기고 기분 좋게 맥주를 들이키며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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