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宮中) 무희(舞姬) 리진
지난 8월 초에 신경숙의 장편소설 리진 (2007)이 앤턴 허(Anton Hur)의 번역으로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아마존에서는 이미 이 책의 보급판을 온라인에서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의 중요 서점에도 이 책이 전시되고 있다. 책의 제목은 ‘궁중 무희(The Court Dancer)’로 바뀌었다. 소설 리진 은 한국에서 신문에 연재되었을 때는 원제명이 ‘푸른 눈물’이었다. 신문 연재본과 한국어 단행본 그리고 영역본이 각각 그 제목을 바꾸어 달고 나온 셈이다.
조선 말엽 궁중의 무희로 프랑스 외교관을 사랑한 ‘리진’은 실존했던 인물이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 국내의 문헌 속에서는 찾을 수 없다. 백년전 프랑스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 조선에 온 프랑스 외교관과 궁중 무희 리진에 대한 사연이 짤막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의 궁중 무희 리진이 외교관을 따라 파리로 가서 우울증에 걸려 지냈다는 간단한 내용을 바탕으로 신경숙은 리진이라는 여인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려낸다. 주인공 리진은 기울어가는 왕조의 마지막 명운을 붙잡고 섰던 왕비의 총애 속에서 궁중의 무희로 자라났다. 조선의 궁중에서 나비 같이 춤을 추던 이 아릿다운 여인은 낯선 프랑스로 건너가 물빛 드레스를 입고 파리의 거리를 거닐었다. 신경숙은 이 여인에게 모국어의 영역을 벗어나 프랑스어를 습득하게 했다. 그리고 새로 배운 프랑스어로 모파상의 작품을 낭독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는 이 새로운 삶이 환희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언제나 무너지고 있는 조선 왕조와 그 왕조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에 담고 있던 왕비만이 걱정이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허용된 각별한 운명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만이 알아낸 역사를 살아야 했고, 그 자신만의 생각으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 자신만의 기억 속에 사랑을 담았다.
모두가 망각해버린 이 여인의 삶을 통해 작가 신경숙이 말하고자 한 것은 패망해 가는 왕조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리진은 우여곡절 끝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서구의 근대 문물을 몸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녀는 결국 참극의 주인공이 된 왕비(명성황후)의 죽음의 진실을 자신의 죽음으로 알리는 길을 택한다. 소설 속에서 리진은 참혹하게 죽어갔다. 그녀가 서양을 배우기 위해 터득했던 프랑스어를 모두 자기 목구멍으로 삼켜버리듯, 독이 묻은 프랑스어 사전 한 장 한 장을 뜯어 삼켜야 했다. 그녀는 그녀가 몸소 부딪치고, 맑은 눈으로 보고, 그녀의 아름다운 입으로 말했던 새로운 세계를 다시는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봉건 왕조의 붕괴 과정 속에서 근대를 한 몸에 지니고 살아야 했던 리진이라는 여인의 삶에서 여성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불화를 함께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이 소설의 풍부한 서사성을 말해준다.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지의 서평에서는 궁중 무희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 한 궁중 무희의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프랑스 외교관의 마음을 사로잡은 ‘리진’이라는 궁중의 무희를 내세워 격동기 한국 사회의 변화를 특이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이 소설은 이 자기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를 그 배경으로 펼쳐 보임으로써 고립된 조선과 선진화한 유럽 특히 프랑스의 사회 문화적 불균형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아시안 리뷰 오브 북스(Asian Review of Books)에서는 아주 긴 서평을 냈다. ‘맨 아시아 상’을 수상한 작가 신경숙의 신작소설 궁중 무희는 여러 가지 방향으로 읽힐 수 있는 흥미롭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서구의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는 알려 있고 익숙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다. 작가 신경숙은 바로 그런 점에 착안 하여 이 격동의 시대에 한국의 궁중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하여 이를 재현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문화와 한국의 풍속을 아름답게 대조해 보이는 이 소설은 한 운명적인 궁중의 무희의 생애를 통해 한국인의 삶의 우여곡절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번역자의 유창한 영어 번역이 이 소설의 정감을 끝까지 살려내는 데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미국 국영라디오 (National Public Radio)의 북 리뷰에서는 신경숙이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합당한 이유가 이 소설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인간의 마음의 미묘함에 대한 그녀의 깊은 이해를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조선 왕궁의 아름다운 무희였던 리진은 프랑스로 건너가 거기서 비단 부채를 만들면서 자신에게 밀려드는 슬픔을 거기에 수놓는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소설 속에 담겨 있지만 그것은 작가의 섬세한 묘사를 통해 살아나고 있다고 평했다.
신경숙은 지난 2011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엄마를 부탁해(Please Look After Mom)로 세계문학의 무대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I’ll Be Right There(2014)와 외딴 방 (The Girl Who Wrote Loneliness(2015)을 영어로 번역 출판하면서 그 문학의 고뇌와 깊이를 자랑하게 되었다. 이번에 나온 리진 (The Court Dancer)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를 뛰어넘는 신경숙의 소설적 상상력의 폭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일 것으로 생각된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후 몇 년을 칩거하고 있는 그녀가 다시 독자들 앞에 멋진 소설을 가지고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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