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12월 7일 동아일보 학예면에 흥미로운 투고 기사가 하나 실렸다. 글을 쓴 사람은 만해 한용운이며 투고문의 제목은 ‘가갸날에 대(對)하야’ 라고 되어 있다. ‘가갸날’을 정하여 처음으로 기념식을 거행한지 한 달이 지난 후의 일이다. 투고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표기는 현행대로 고침)
나는 신문지를 통하여 가갸날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기사를 보고 무엇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이상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갸>와 <날>이라는 말을 따로 떼어 놓으면 누구든지 흔히 말하고 듣는 것이라 너무도 심상하여 아무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고 흔한 말을 모아서 <가갸날>이라고 한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 그리 새롭고 반가워서 이상한 인상을 주게 됩니다. 가갸날에 대한 인상을 구태여 말하자면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님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쟁여 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가감과 장식이 없는 나의 가갸날에 대한 솔직한 인상입니다. 이 인상은 무론 흔히 연상하기 쉬운 민족관념이니 조국관념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도 또는 무슨 까닭 많은 이론을 떠나서 직감적 거의 무의식적으로 받은 바 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직감적 인상 그것이 곧 인생의 모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갸날>이라는 이름도 매우 잘 지어진 듯합니다. 무론 <가갸날>이라고 아니하고도 얼마든지 달리 이름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어도 <가갸날>같이 짧고 쉽고 반갑고 힘있고 또한 여러 가지로 좋기가 어려우리라고 생각됩니다. 전에도 우리말을 연구하자느니 우리글을 많이 쓰자느니 하는 말이 많이 있어서 그러한 말들이 다소의 효과를 내었고 또 앞으로 그러한 일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말과 아름다운 글을 많이 낸다 하여도 <가갸날>과 같이 쉽게 알고 길게 잊히지 아니할 수 가 없을 듯하외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가갸날의 기념을 창업한 이는 우리 무리 중의 큰일을 한사람의 하나이 될 것이외다. 가갸날에 대하여는 누구든지 스스로 힘쓸 일이지마는 특히 언론기관은 책임을 지고 선전하며 스스로 그 뜻을 체인하야 말과 글에 맞도록 힘써야만 할 줄로 압니다. 천애윤락 바다 언덕의 작은 절에서 스스로 게으름 속에 장사지낸 나라도 <가갸날>에 힘을 입어 먹을 갈고 붓을 드는 큰 용기를 내어 아래와 같은 시를 쓰게 되었사외다.
가갸날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이-」 「시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두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아르켜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써서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소리쳐 「가갸날」을 자랑하겠습니다.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여.
‘
가갸날’이라는 말은 한글날을 처음 정했던 때의 이름이다. 1926년 음력 9월 29일이며 양력으로는 11월 4일이 바로 그날이다.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주동이 되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480주년이 된 해를 맞이하여 기념식을 갖고, 이날을 제1회 '가갸날'로 정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3.1운동 직후인 1921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민간단체이다. 창립 당시에는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김윤경, 최두선 등이 주도했고 뒤에 최현배, 이윤재, 이병기, 정인승 등이 참여하면서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로 국어국문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이 처음 가갸날을 음력 9월 29일로 정했던 까닭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훈민정음을 반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이 기록을 따라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기념하였다.한용운은 ‘가갸날’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동아일보에 투고 형식으로 자신의 감회를 적어 보냈다. 그리고 ‘가갸날’을 기념하는 축시까지 적었다. 그는 ‘가갸날’에 대한 인상을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님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쟁여 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가감과 장식이 없는 나의 가갸날에 대한 솔직한 인상입니다.’ 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미 시집 <님의 침묵>(1926. 5)을 통해 국문 시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그는 ‘가갸날’에 대하여 이렇게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갸날’이라는 이름은 그 이듬해인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면서 바로 바뀌었다. ‘가갸날’을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기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날짜는 계속 음력으로 9월 29일을 기념하였다. ‘가갸날’이라는 이름은 결국 한 해 동안 사용된 후 폐기된 셈이다. 한글날의 날짜가 음력에서 양력으로 고쳐진 것은 1932년이다. 이해부터 한글날을 양력 날짜로 환산하여 10월 29일로 고정하기로 하고 기념행사도 가졌는데, 1934년부터는 정확한 양력 환산법을 적용하여 10월 28일로 정정하였다.
한글날이 오늘날과 같이 양력 10월 9일로 정해진 것은 1945년 해방 직후의 일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 7월 새롭게 발견한 <훈민정음> 원본 서문에 훈민정음 반포일이 9월 '상한(上澣)'으로 나타나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가 우리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선어말살정책’을 강압적으로 펴고 있던 때여서 이를 널리 알릴 수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 기록을 근거로 상순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였다. 한글날은 이러한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 한글날부터는 법정 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한다. 한글의 위대한 가치와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볼 일이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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