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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비평가 김윤식 혹은 발로 쓰는 비평

 

비평가 김윤식 선생은 자신의 비평이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아주 간단한 비유적인 진술이긴 하지만, 비평의 본질과 기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이 말의 뜻은 아마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비평의 본질에 대한 해석을 생각할 수 있다. 비평이라는 말 속에는 가려내고 따진다.’ 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대상에 대한 언어적 인식 행위로서의 비평은, 그렇기 때문에 논리성을 근간으로 한다. 물론 위대한 비평이란 어떤 형식을 취하든 간에 언제나 창조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생이 지적하고 있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란 언어적 기술 그 자체를 의미함이 아닐까 한다. 비평의 행위를 언어의 기술과 그 논리로만 이해하고자 할 때, 비평은 손끝에서 논다. 비평을 위한 비평의 존재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으나, 비평 자체의 논리에 대한 집착을 더욱 중시할 경우 비평은 손끝을 벗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발로 쓰는 것으로서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언어적 기술이나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 비평 자체의 논리에 의해서 성립되는 비평이 아니라, 삶의 현실의 논리를 따라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로 쓰는 비평은 언어적인 인식 형태를 넘어서서 생의 형식을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발로 쓰는 비평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논리적 형식보다는 실증적인 내용에 더욱 관심을 둔다.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것에,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앞세운다. ‘발로 쓰는 비평은 현실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비평의 대상이 되는 문학과 함께 존재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문학을 보는 수많은 독자와 함께한다. 독자와 더불어 문학을 보고, 삶을 생각하며 현실에 골몰한다. 문학을 통해 역사를 돌이켜보고 다시 오는 앞날을 가늠하기도 한다. ‘발로 쓰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선생의 비평에는 언제나 살아있는 문제들이 살아난다.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십상인 작가 시인들이 선생의 비평 속에서는 평범한 일상적 존재로 변한다. 작가 시인들이 고뇌했던 문학적 테마들도 선생의 비평 속에서는 인간의 삶의 문제로 부각된다.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한 관심, 이것이야말로 선생의 발로 쓰는 비평의 핵심에 해당된다.

 

김윤식 선생은 평단의 누구도 따르기 힘든 엄청난 독서로부터 비평작업을 시작한다. 선생의 연구실에서 나는 한번도 책을 펴들고 있지 않은 모습을 뵌 적이 없다. 언제나 책상 위에 책을 펼쳐놓고 원고지에 무언가를 쓴다. 뒷사람들이 읽을 것도 좀 남겨두시라고 농담반 진담반의 말씀을 드린 적도 있지만, 그저 소리없는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선생은 국내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들의 소설들을 매달 거의 빼놓지 않고 챙겨 읽는 것으로 유명하다. 읽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선생의 비평 작업의 첫 번째의 전제이다. 많은 작품을 고루 읽게 되니, 소설 문단의 흐름에 훤하다. 그리고 읽은 뒤의 비평적인 소감을 그대로 묵혀두지 않기 위해, 모든 비평가들이 귀찮게 여기는 소설 월평에 적극 참여한다. 문단의 현장 감각을 잃지 않고 관심의 끈을 지탱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런 방식으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윤식 선생의 소설 읽기는 작가라는 인간과 선생 자신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서로 맞서기에 다름 아니다. 이 맞서기 작업의 첫 대상이 춘원 이광수였음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맞서기 작업은 승부를 결정짓는 싸움은 아니다. 서투른 독자들은 선생에 의한 이광수 극복을 운위할지도 모르지만, 선생은 오히려 이광수를 오늘의 현실 속에 다시 세우고 그와 함께 산다. 이런 식의 맞서기는 그 뒤에도 계속되어, 성생의 주변에 많은 작가들이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소설을 예술이라고 믿었던 김동인의 오만한 모습도 그 어깨 너머에 보이고, 관점의 중립을 소설적 미덕으로 자랑했던 염상섭도 선생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천재 이상도 선생의 오른쪽에서 귀엣말을 주고받는다. 선생과 동시대를 살아온 최인훈도, 이청준도, 최일남도 보인다. 박완서나 김원일이나 전상국도 눈짓을 준다. 최수철이나 채영주같은 작가들도 함께 끼어있다. 이 모든 작가들이 일제히 함께 일어나서 자신들이 고심했던 문제들을 선생은 다시 묻고 대답한다. 이 쉼없는 대화와 맞서기를 통해 선생은 백발의 머리칼로 평단의 후배들을 조급하게 한다.

김윤식 선생의 소설 읽기 작업은 누워있는 작가를 일떠세우고 딴전부리는 작가를 채근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선생은 소설에 매달리고, 소설의 형식에 미학적 요건을 부여해온 많은 이론가들을 극복해내고 있다. 정말이다. 소설가들과 맞서기 위해서 선생은 루카치를 극복해야 했고 골드만을 이겨야 했던 것이다. 바흐찐과도 싸우더니 요즈음은 푸코를 이기는 중이다. 참으로 고달픈 투쟁을 소설을 위해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윤식 선생은 소설에 신들린 건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것을 인간이 걸린 병이라고 규정한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또다른 하나의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의 병이 소설이라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의 본질과도 통하는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선생의 비평 작업 뒤에 숨겨진 진정한 소설의 모습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김윤식 선생의 비평은 그 엄청난 저술로 인하여 평판을 압도한다. 선생이 내놓은 저서가 백 권을 훨씬 넘고, 이 모두가 우리 문학의 해석과 평가를 위해 바쳐진 것임은 물론이다. 이 많은 저술들에서 선생이 가장 커다란 문제로 다루어온 것은, 우리 문학에서 근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선생이 맞서기의 상대로 살았던 모든 작가들에게 던졌던 것이며, 우리 문단과 학계에 내놓은 명제이기도 하다. 이 명제는 우리 현대문학사의 본질에도 해당되는 것일 터인데, 아직도 해답이 명쾌한 것은 아니다.

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쓰는 비평으로 실증적 기반을 확보하였고, 그 위에서 정신적인 것의 규명에 나서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인 것이란 구체적인 실증적인 것과는 달리 내적인 욕구와 연관된다. 선생은 이 작업이 궁극적으로 삶의 통합 또는 전체성을 목표로 삼는 것임을 자주 암시하고 있다. 문학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선생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딜타이의 입장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헤겔의 숨결을 느낄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선생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비평적 열정을 놓칠 수가 없다.

김윤식 선생과 자리를 함께 하여 차 한잔이라도 나누어 본 사람이라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선생의 첫 표정에 그만 질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일이라면 선생은 무슨 문제이든지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입을 연다. 문학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지 따위의 문학개론식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드는 힘 있는 말들이 계속된다. 선생의 모든 문학적 담화들은 지금’ ‘여기의 문제들이 중심을 이룬다. 선생의 비평적 감각이 언제나 살아있는 정신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윤식 선생의 비평작업은 후학들에게 엄청난 짐이다. 우리 현대문학사 전체의 무게만큼이나 벅찬 것이다. 그러나 이 벅찬 짐을 감당해야 할 후학들은 사실 행복하다. 아무런 짐의 무게도 가늠할 수 없던 진공지대에서 비평의 균형을 잡아야 했던 선생의 힘든 노력에 비하면, 감당해야 할 몫을 그 무게만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사실 그 짐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좀 더 가까이 선생의 비평활동을 돌아보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김윤식 선생 이전에 선생과 같은 비평가가 없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