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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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본명 김정식, 1902-1934)은 평안북도 구성에서 태어났으며 오산학교를 거쳐 배재고보를 졸업했습니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하여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했지만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1920년 3월 오산학교 재학 당시 스승이던 김억(金億)의 도움으로 《창조》5호에 작품 「낭인의 봄」, 「야(夜)의 우적(雨滴)」 등을 발표함으로써 시단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후 많은 작품을 발표하여 초창기 시단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김소월은 근대시의 형성 과정에서 한국적 서정시를 확립한 시인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서구시의 형식을 번안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던 한국 근대시에 새로운 독자적인 형식과 기법을 정착시켜 놓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시적 형식은 전통적인 민요의 율조와 토속적인 언어 감각의 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의 시는 각각의 작품들이 모두 균제된 시적 형식을 이루고 있으며, 그 자체의 형식을 통해 서정시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김소월은 서정시의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정감의 세계를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면서도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그려내기보다는 개인적인 정감의 세계 속으로 자연을 끌어들여 그 정조에 바탕을 두고 그것을 노래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에서 즐겨 다루어지고 있는 자연은 서정적 자아의 내면 공간으로 바뀌고 있으며, 개별적인 정서의 실체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진달래꽃」, 「산유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접동새」 등이 모두 이 같은 예에 속합니다. 김소월이 노래하고 있는 「진달래꽃」에서의 사랑의 의미는 「산유화」에서의 자연에 대한 인식이라든지, 「접동새」에서 볼 수 있는 허무의 삶 등과 정서의 기반을 같이합니다. 이것은 한국인들의 삶과 한국인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느끼고 있는 정감의 세계를 표현해 주는 것입니다. 민족적 정서의 시적 구현 자체가 김소월 시의 존재를 드러내어 주는 것이라면, 김소월의 시에서 바로 그러한 정서적 특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김소월의 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개인적인 정감의 세계는 삶의 희망과 환희보다는 고통과 슬픔이 중심을 이룹니다. 이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정서적 취향과도 관계되는 것이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한국 민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슬픔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더면」과 같은 작품은 꿈과 현실의 엄청난 이율배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꿈속의 상황은 벌판에서 하루 일을 마치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제시되고 있는데, 물론 현실 속에서는 이와 다르다. 서정적 자아는 집도 잃고 땅도 잃어버린 상태에서 농사지을 수도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탄식 속에 떠돌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현실 속에서도 서정적 자아는 좌절하지 않지요. 산비탈의 가파른 밭을 매는 사람처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옷과 밥과 자유」에서 ‘새’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있는 존재입니다. 공중을 날며 자유롭게 생활하는 새와는 달리, 적유령 넘어가는 짐 실은 나귀의 행색은 처량합니다. ‘짐 실은 나귀’는 궁핍과 부자유와 고통의 삶을 의미하지요. 이 같은 삶의 모습은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민족의 모습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김소월은 한국 민족의 삶을 노래하고 있으며, 그 노래 자체가 고통스런 삶을 이겨나가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소월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란이 이어져 왔습니다. 먼저 김소월의 작품 활동을 보면 그는 당대 문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소월은 동인지 《창조》에 시를 처음 발표하기는 하였지만 동인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23년 동경상과대학에 입학하였지만 대지진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 그는 다시 동경으로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서울에 머물지 않고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으로 내려가서는 집안의 사업을 도왔습니다. 1924년 문학동인지《영대》에 이름을 올렸지만 편집에 직접 관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김소월의 죽음을 둘러싼 자살 의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김소월의 부음이 서울에 전해진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사흘 뒤였습니다. 당시 조선일보는 (34. 12. 27) 청년시인 소월 김정식씨가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24일 아침 뇌일혈로 급작스럽게 별세하였다고 보도하였고, 동아일보(1934. 12. 27)는 시인 김소월이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西山)면 평지(坪地)동 자택에서 24일 오전 8시에 돌연 별세하였는데 그가 최근까지 무슨 저술에 착수 중이었다고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소월의 죽음은 그 뒤 자살로 알려지면서 더욱 큰 충격을 던졌지요.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하였다는 주장은 수많은 논저에서도 반복되어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최근 김상은 씨의 증언에 의하면 김소월은 심한 관절염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더해지면 하는 수 없이 아편을 조금씩 복용하여 그 통증을 잊고자 하였습니다. 소월의 죽음은 바로 이 관절염의 고통을 잊고자 과량으로 복용한 아편 때문이었습니다.
김소월의 죽음과 그 시기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기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대부분의 문학사, 문학사전, 작품선집 등에서는 김소월의 생애를 1903년생 1935년 사망으로 기록해 왔었습니다. 북한 최대의 『문학예술대사전』에도 김소월의 생애는 이렇게 표기되었지요. 그런데 최근 『조선문학사』(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2000) 제7권 (112면-117면)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오기를 바로잡아, 1902년생, 1934년 사망으로 고쳤음을 확인했습니다. 북한 문학에 정통한 학자들 사이에 한때 이러한 기록의 문제가 거론된 적도 있는데, 이제는 사실적 기록을 일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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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이 생전에 출간한 시집은 『진달래꽃』(1925)이 유일합니다.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펴낸 『소월시초』(1939)는 첫 시집에 수록되지 못한 김소월의 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시선집에 해당합니다. 시집 『진달래꽃』은 대한민국 문화재위원회에서 2011년 근대문학 작품 가운데 최초로 근대문화재로 등록했습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일이지요. 그런데 근대문화재 등록 예고기간 중에 특이한 일이 생겼습니다. 시집 『진달래꽃』의 두 가지 형태의 판본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는 매문사 발행,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의 『진달내꽃』이고, 다른 하나는 매문사 발행, 중앙서림 총판의 『진달내』입니다. 이 두 가지 판본은 모두 1925년 12월 매문사(賣文社)에서 발간된 것인데, 그 판형, 수록 작품, 편집방식, 가격 등이 동일합니다.
여기 사진을 통해 두 가지 판본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 『진달내꽃』은 겉표지에 표제인 ‘진달내꽃’과 함께 ‘詩集’과 ‘金素月作’이라는 한자 도안글씨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표지 중앙에는 진달래꽃과 바위산이 채색화로 그려져 있는 양장본이지요. 본문은 모두 234면이며 판형은 국판(菊版) 크기의 절반에 해당하는 국반판인데, 속표지에는 ‘素月作 진달내ᄭᅩᆺ’이 세로쓰기의 형태로 붉게 인쇄되어 있습니다. 시집의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며, 본문에 총 127편의 시를 16장으로 구분하여 싣고 있어요. 이 초판본은 현재 국내에 몇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학 도서관에 두어 곳 보존되어 있지만 표지가 모두 훼손되어 있어요. 책의 체제가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된 것으로는 국어학자 이기문 교수 소장본 1권, 서적수집 기관인 화봉문고 소장본 1권,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본 1권 외에 몇몇 개인 소장자의 소장본이 있을 뿐입니다. 다음에 소개하는 책은 화봉문고 소장본입니다.
시집 『진달내꽃』의 출판 사항은 이 책의 판권 난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표제 : 진달내꽃
정가 : 1圓20錢
인쇄일 : 大正14年 12月 23日(1925. 12. 23)
발행일 : 大正14年 12月 26日(1925. 12. 26)
저작자 겸 발행인 : 金廷湜
주소 : 경성부 연건동 121번지
인쇄자 : 魯基禎
주소 : 경성부 견지동 32번지
인쇄소 : 漢城圖書株式會社
주소 : 경성부 견지동 32번지
발행 : 賣文社
주소 : 경성부 연건동 121번지
총판매소 : 漢城圖書株式會社
주소 : 경성부 견지동 32번지
앞의 출판 사항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시집 『진달내꽃』의 출간 당시 김소월의 경성 주소가 출판사 매문사와 동일하게 표시된 점,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인쇄와 총판을 담당했다는 점 등입니다.
그러면 또다른 판본인 중앙서림 총판본은 어떤 형태인지를 보기로 합시다. 중앙서림 총판본은 특이하게도 그 표제가 『진달내ᄭᅩᆺ』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겉표지가 청회색으로 채색된 양장본입니다. 겉표지에는 ‘金素月詩集’이라는 소제목의 글자와 ‘진달내ᄭᅩᆺ’이라는 표제가 우측에서 좌측으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표제 아래에 밑줄이 그어져 있으며 표지에는 아무런 도안이 없고 표지의 하단 부분에는 ‘-1925-’라는 발간 연도가 표시되어 있습다. 이 책의 속표지에서는 세로쓰기로 ‘素月作’이라는 지은이 표시와 함께 ‘진달내ᄭᅩᆺ’이라는 표제가 감색(紺色)으로 인쇄되어 있습니다. 국반판으로 본문은 총 234면이며, 본문의 목차와 면수와 판형, 그리고 본문 수록 작품의 내용과 조판 방식이나 인쇄 활자 크기도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과 동일하지요. 『진달내ᄭᅩᆺ』의 판권지를 보면, 책 표제가 ‘진달내’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출판사항은 모두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과 동일하고 총판매소가 ‘한성도서주식회사’가 아니라 ‘중앙서림(中央書林)’으로 표시되어 있는 점이 서로 다릅니다. 이 판본은 문학평론가 김재홍 교수가 운영하고 있는 한국현대시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개인 소장가 윤길수(尹吉洙) 씨 외에 한두 분이 더 소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진달내꽃』(한성도서 총판본)과 『진달내ᄭᅩᆺ』(중앙서림 총판본)은 판권 란의 출판사항을 통해 매문사에서 동일 시기인 1925년(대정 14년) 12월 23일 인쇄, 12월 26일 발행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첫시집은 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표지로 같은 날짜에 출판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는 1) 동일본 여부에 대한 검토, 2) 초판본과 재판본의 가능성, 3) 후대인에 의한 표지 제본 가능성 등 여러 가지 문제가 검토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본 식민지 시대의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납본 의무가 매우 엄격했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집 『진달내꽃』의 두 가지 판본을 조사하면서 서지학적인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부분은 것은 책의 표제에 대한 표기 방식입니다. 한성도서 총판본은 시집 표제의 표기에 일관성이 없습니다. 겉표지와 판권지는 표제를 ‘진달내꽃’이라고 표기하였는데, 속표지의 경우는 ‘진달내ᄭᅩᆺ’으로 표기했고, 본문 속에도 ‘진달내ᄭᅩᆺ’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서림 총판본은 시집의 표제가 일관되게 ‘진달내ᄭᅩᆺ’이라고 표기되었습니다. 겉표지와 속표지 그리고 판권지의 표제 표기가 동일합니다. 표제의 한글 표기 문제도 흥미롭지요. 그러나 이 표기 문제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공포 이전이므로 ‘진달내꽃’과 ‘진달내ᄭᅩᆺ’ 가운데 어느 것이 선행되는 표기 방법인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가지 표기가 모두 표준어 표기와는 다르고 ‘ᄭᅩᆺ’과 ‘꽃’이라는 글자가 서로 뒤섞여 쓰인 예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매우 의미있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가 1926년 1월 8일에 보도한 김소월 시집 『진달내ᄭᅩᆺ』의 신간소식을 보면 ‘매문사 발행, 중앙서림 총판’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신문의 보도 내용으로 보면 중앙서림 총판본이 당시 신간으로 소개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신문보도가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닙니다. 이미 검토한 것처럼 한성도서 총판본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판본을 놓고 혹시 초판을 발간한 직후 매진이 되어 곧바로 판형을 그대로 한 채 표지 장정만 바꾸고 총판매소를 바꾸어 다시 재판을 인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후 관계를 밝힐 근거가 없어요. 더구나 재판을 발간하였다면 왜 판차(版次)를 표시하지 않고 발행일을 동일하게 했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의 시집 출판이 대개 2백부 정도로 한정되었으며 1920년대 시집 출판의 경우 재판 인쇄가 이루어졌던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전문가도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초판과 재판이 거의 동시에 나왔다는 추정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문제의 시집을 발행한 출판사 매문사는 시인 김억이 직접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출판사에서 왜 총판을 달리한 두 종류의 판본을 같은 시기에 내놓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문화재위원회에서는 전문가들의 조사를 통해 이 두 가지 판본이 모두 동일 출판사에서 같은 시기에 나온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두 가지 판본을 모두 근대문화재로 등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시집의 초판을 규정하는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 두 가지 판본의 시집 내용을 정밀하게 대조한 결과가 최근 미국 하버드 대학 동아시아어문화과 박사논문을 통해 밝혀졌습니다. 그 장본이이 바로 현재 서강대학교 한국학부 교수인 웨인 프레머리 박사입니다. 웨인 교수는 한국근대문학을 연구하고 있는 젊은 미국인 학자인데 한국근대문학의 서지학적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박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웨인 교수는 김소월의 시집 『진달내ᄭᅩᆺ』의 두 가지 판본이 목차와 본문의 인쇄 활자가 동일하고 그 조판 방식이 그대로 일치하고 있지만, 몇 군데 특기할 만한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을 밝혀내었습니다.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의 경우 본문 66면, 84면, 180면 등 여러 곳에서 오자(誤字)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물론 중앙서림 총판본에는 이런 오자(誤字)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하였습니다. 두 판본이 동일한 지형을 사용했다면 이러한 인쇄상의 오자가 나올 가능성이 없지요. 이런 지적으로 인하여 두 판본 간의 선후 관계를 설명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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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의 시가 포괄하고 있는 정서의 폭과 깊이는 서정시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경지에 맞닿아 있습니다. 흔히 정한(情恨)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소월 시의 특질을 규정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민족적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가로놓여 있지요. 김소월이 그의 시에서 즐겨 노래하고 있는 대상은 ‘가신 님’이거나, ‘떠나온 고향’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모두가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임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심정은 어떤 면에서 퇴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시는 다시 만나기 어렵고 찾기 힘든 그리움의 대상을 끈질기게 추구함으로써 고통의 현실을 정신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올해는 시인 김소월의 탄생 110주년입니다. 그동안 성동구청과 구민 여러분들은 힘을 모아 유서 깊은 왕십리역을 현대적인 역사로 재개발하고 역광장을 공원으로 꾸미면서 소월의 흉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 옆에 모두가 즐겨 외는 시 <왕십리>를 새긴 시비를 세웠습니다. 우리가 모인 이 아기자기한 공연장도 소월아트홀로 명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김소월 탄생 1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소월을 노래하다>라는 주제의 문학콘서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김소월을 존경하고 소월의 시를 사랑하는 성동구민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김소월은 북한의 평북 구성에서 태어났으므로 남쪽에 연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뜻깊은 행사를 계기로 김소월은 또 하나의 고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동의 왕십리에서 소월은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가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