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

권영민의 그때 그곳<10·끝> : 한용운의 첫 집이자 마지막 집, 서울 성북동 심우장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사진)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은 작은 암자처럼 고즈넉하다. 심우장에 오르는 좁은 비탈길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어지럽고 지저분하다. 성북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이 언덕배기 동네는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주민들의 심경도 복잡한 듯하다. 담벼락에 온갖 욕설까지 섞인 구호가 덕지덕지 붙었다. 한용운이 살아서 이런 정경을 본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한용운은 충남 홍성의 외진 촌락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던 그는 동학에 가담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가난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큰 뜻을 세웠다. 그러나 동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설악산 오세암에 숨어든 것은 나이 스물이 훨씬 넘어서의 일..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9> : 시인 공초 오상순과 서울 명동의 청동다방 지난달 13일 권영민 교수(왼쪽)와 이근배 시인이 서울 명동의 청동다방 자리(두 사람 뒤편)를 방문했다. 지금은 옷가게로 변한 이곳은 1950년대 공초 오상순을 필두로 한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 서울 명동은 항시 세일 중이다. 호화스러운 간판과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호객 소리가 요란하다. 1950년대 꿈과 낭만, 사랑과 열정의 공간이었던 명동은 가장 화려한 패션의 거리로 변했다. 명동예술극장 건너편으로 유네스코 회관을 지나 골목 모퉁이에 있었던 ‘청동(靑銅)다방’. 이제는 그 자리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청동다방의 주인공이라면 단연코 시인 오상순(1894∼1963)이다. 오상순의 ‘청동다방 시대’라고 해도 좋다. 아니 청동다방의 ‘오상순 시대’라야 더 어울릴 듯하다. 공초는 매일같이 다방 ‘청동’..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8> : 10주기 맞은 이문구의 보령 생가터, 집필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계곡에 있는 이문구의 집필실을 찾은 권영민 교수. 10년 전 주인을 잃은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었다. 《 ‘관촌수필’의 작가인 이문구(1941∼2003)가 글쓰기를 위해 기거했던 오두막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10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이 집은 그대로 비어 있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다. 나는 동향의 문단 후배가 되어 몇 차례 이곳에서 이문구와 만났었다. 집필실이라는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이 조그만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진당산 아래 골짜기는 조선 후기 유학자 토정 이지함을 배향하던 화암서원(花巖書院)이 가깝다. 나지막한 산자락 끝으로는 청천저수지가 널따랗게 펼쳐있다. 이문구는 1989년 이..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7> : 한국 첫 예술전문 교육기관, 상고예술학원 6·25전쟁 기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전문기관으로 세워진 ‘상고예술학원’이 있던 자리를 권영민 교수(왼쪽)와 이주형 경북대 명예교수가 둘러보고 있다. 사진 왼쪽 담이 있는 자리 일대(대구 남산동 657 일대)에 상고예술학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소설가 최정희 선생(1906∼1990)은 1952년 첫 수필집 ‘사랑의 이력’을 펴냈다. 6·25전쟁의 혼란이 한창이던 서울에서였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시절에 책을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때였지만 화가 김환기가 표지 장정 그림을 맡았고 계몽사가 선뜻 출판했다. 소설가 김동리는 이 책이 나오자 ‘평범한 말, 부드러운 문장으로 정한의 세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책을 펴면 최정희 선생이 대구에 ..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6> : 가람 이병기가 말년 보낸 '현대 시조문학의 성소' 익산 생가 《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1891∼1968)의 생가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에 남아있다. 한국 근대문인의 생가 가운데 그 단아한 초가집의 원형이 유일하게 그대로 보존돼있다. 가람은 이 집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냈고, 노후에 이곳을 찾아 자족하며 시조를 짓고 화초와 벗 삼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 바로 이 집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언덕에 묻혔다. 이곳에 가람의 삶이 그대로 담겼고, 그 문학의 향취가 살아있는 것이다. 》 날이 풀려 고드름이 똑똑 물방울을 떨어뜨리던 14일 오후 이곳을 찾았다. 학생들과 답사차 몇 번 왔는데 헤아려 보니 벌써 10여 년 만이다. 가람 생가 입구에 서니 가장 먼저 반기는 자그마한 모정(茅亭)인 승운정(勝雲亭)이 정겹다. 그 옆으로 담도 대문도 ..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5> : 시인 박인환이 1945년부터 3년간 낸 서점, 서울 종로3가 ‘마리서사’ 《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1883∼1956).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 접했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도 함께 어울리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시인 박인환(1926∼1956·사진)은 이 자유분방한 여성 예술가의 이름을 따 광복 직후인 1945년 말 서울 종로3가 2번지에 서점 하나를 차린다. ‘마리서사(茉莉書舍).’ 시인이 열아홉 살 때 일이다. 》 강원 인제 태생인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광복을 맞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부모의 도움을 받아 이 책방을 열었다. 박인환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다. 책방은 20평(약 66m²) 남짓이었지만 서구..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4> : 6·25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 부산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 1950년대 초 밀다원 다방이 있었던 곳(광복동2가 38-2)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이제 의류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다. 권영민 교수(왼쪽)와 소설가 허택 씨가 현장을 찾았지만 밀다원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란민들은 “남으로” “남으로”를 외쳤다. 당시 부산은 인구 20만 명 정도의 도시였지만 전국에서 10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인산인해의 불안하고 지친 풍경. 이 가운데는 문인들도 있었다. 피란민들은 이제 더는 피할 수 없는 땅의 끝, 국토 남단의 항구도시에 도달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하루하루의 생존이 급한 상황. 하지만 문인들은 이 절박한 피란도시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웠다. 부산 광복동에 위치했던 다방 ‘밀다원(蜜茶苑)’이 그들의 아지트였다. 》..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3> : 광복 전후 이광수가 은거했던 남양주 사릉과 봉선사 경기 남양주시 사릉천. 하천의 오른쪽에 인가가 있지만 이광수의 농막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이광수는 이 천변을 거닐다 광복 소식을 처음 들었다. 《 1945년 8월 16일 아침. 경기 양주(현 남양주) 진건면 사릉리에서 살던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이날도 집 근처 사릉천변에 산보를 나갔다. 하지만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 개천가에서 일본 군인의 감독 아래 자갈을 파는 노역을 하던 근로보국대 대원들이 웬일인지 일을 하지 않고 삽을 든 채 서성거렸고, 그 수도 평소보다 훨씬 적어 보였다. 게다가 일본 군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 운허 스님이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헤친 채 바쁜 걸음으로 냇둑을 걸어오며 이광수를 향해 소리쳤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2> : 윤동주 유고 시집이 숨겨져 있던 전남 광양 정병욱 생가 《 매년 봄이 되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 일대. 남해와 맞닿은 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엔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인연이 깃든 정병욱의 생가가 남아 있다. 윤동주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비밀을 품은 집이다. 시간을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으로 돌려본다. 》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전문(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한 뒤 가장 먼저 친해진 선배가 윤동주였다. 신문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윤동주가 먼저 정병욱을 찾았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학교 2년 선배였다. 멀리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온 윤동주와 전남 광양에서 온 정병욱, 두 문청(文靑)은 글을 통해 가까워졌다. 정병욱.. 더보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1> : 1942년 봄 경주 건천역, 박목월-조지훈의 첫 만남 * 에 연재 중인 을 전문 게재합니다. 《 문학작품은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잉태되는 결실이다.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잊을 수 없는 공간과 만남들을 더듬어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는 개인과 시대의 문학세계라는, 강(江)의 발원지를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와 기자가 함께 전국을 돌며 발품을 팔았다. 먼저 청년 목월과 지훈이 처음 만났던 1942년 봄으로 시간을 돌려 경주 건천역을 찾았다. 》 일제강점기 말, 촉망받는 시인 두 명이 문단에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다. 1939년 잡지 ‘문장’을 통해 데뷔한 박목월(1916∼1978)과 이듬해 같은 잡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조지훈(19..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