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초가을 빗속에서 얻은 시집 「백록담」

문학콘서트 2013. 5. 21. 19:10

이렇게 많은 책들을 나중에 어떻게 해요?

아내는 가끔 책방 청소를 하면서 내게 묻곤 한다. 나는 대답 대신에 그저 빙그시 웃는다. 학교 연구실에 쌓아둔 책과 고향집으로 옮겨 둔 책들까지 모두 어떻게 처리할 것이지 궁리해 본 적이 없다. 공부하는 사람이니 책이 재산이지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할 뿐이다.

내가 책을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은 가난한 대학원 시절부터다. 지금은 대학 근처에 둘러볼 만한 헌책방이 별로 없지만, 그 시절에는 대학천에서부터 청계천으로 이르는 골목이 모두 책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대개 헌책을 사고팔았다. 우리 같은 가난한 학생들이 학기가 끝난 후 강의 교재를 내다 팔기도 했고, 새 학기 강의를 위해 남이 내다판 책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던 곳이다. 나는 곧잘 청계천 헌책방 순례를 하곤 했다. 몇 군데 서점은 주인도 나를 알아볼 정도로 친했다. 그때 구했던 책 가운데에는 임화 평론집 문학의 논리,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 최남선의 시조집 백팔번뇌,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의 초판본 등 백여 권의 문학 서적이 있다.

내가 지금도 자랑하고 싶은 책은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초판본이다. 이 책을 얻은 것이 30년전 일인데 그것이 바로 엊그제같다. 비가 축축히 내리던 초가을 토요일 오후. 날이 궂어서 책방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경문서점이었는지 그 이름이 지금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집에는 가끔 괜찮은 책들이 주인이 앉아 있는 책상 뒤켠의 캐비넷 속에 숨겨져 있었다. 내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이웃 서점의 주인들까지 한데 모여 내기 화투판이 벌어졌다. 주인은 손님이 오는 것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고 화투판에 열중이다. 나는 문학 서적들이 꽂혀 있는 서가를 훑어보고 있었다. 주인이 소변이 급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가게로 들어서는 주인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따로 보관하고 있는 볼 만한 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옆 자리에서 화투장을 펴던 다른 서점 주인이 말참견을 했다. ‘지난번 내게서 가져간 그 시집 있잖아. 그거 넘겼나? 책장사가 책 욕심을 내어서 뭘해.’ 주인은 마지못한 듯이 캐비넷을 열고 신문지로 잘 싸놓은 작은 책 한권을 내게 보였다. 정지용 시집 백록담이다. 노란 바탕 위에 나무 사이로 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옆에 환상처럼 날고 있는 나비 한 마리-. ‘시집(詩集) 백록담(白鹿潭)’이라는 제자(題字)는 출판사에서 갓나온 책처럼 선명하다. 내 가슴이 뛰었다. 수십년 동안을 이렇게 곱게 간직한 책이 있었구나 하고 나는 놀랐다.

내가 책값을 묻자, 주인은 벌써 다른 사람이 주문해둔 것이라서 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시집에 욕심이 나서 내게 팔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주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책을 캐비넷에 집어넣고 화투판으로 끼어 앉았다. 내가 아저씨하며 주인을 부르자, 이번에도 다른 서점 주인이 말을 거들었다. ‘이렇게 비가 오시는 날에도 헌책방 찾아다니는 손님인데, 어지간 하면 넘겨드려.’ 나는 주인의 눈치만 살피며 화투 한 판이 끝날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 화투판이 끝나자 주인이 일어나더니 캐비넷 속의 시집을 다시 꺼내들며 말했다. ‘오늘 비 내리시는 덕인 줄 알아요.’ 나는 그 시집을 받아들고 몇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비가 내리는 초가을 날 헌책방에 들렀던 것이 그만 내게는 큰 횡재가 되었다. 정지용의 백록담초판본을 그것도 그렇게 멀쩡하게 깨끗한 책으로 구했으니. 나는 너무도 기뻐서 가방 속에 책을 챙겨 넣은 후 빗속을 달렸다.

나는 지금도 시집 백록담을 펼쳐들면 그때가 눈에 선하다. 이 시집을 얻었던 때와 같은 그런 기쁨을 이제는 다시 책을 통해 맛보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 속의 시들에서 느낄 수 있는 시인 정지용 특유의 언어적 조형성에 늘 탄복한다. 그리고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똑같은 표지의 요즘 시집들에 대해 불만이다. 똑같은 표지의 시집들처럼 시의 목소리까지 서로 닮아버리면 어쩌나?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