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자료

월간 ‘문학사상’ 500호 낸 권영민 주간(<세계일보>, 2014.6.3.)

문학콘서트 2014. 6. 4. 12:39

‘문학사상’은 1972년 창간됐다. 당대의 ‘까칠한’ 비평가로 활약했던 이어령(80)이 만든 잡지다. 그해 10월호부터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어령은 당대 문단의 주류였던 조연현 김동리 서정주 등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분명한 문학관으로 한국문학의 토양을 바꾸는 데 기여한 비평가였다. 문예계간지 ‘창작과비평’(1966)과 ‘문학과지성’(1970) 창간에 이어, 시대정신을 아우르던 ‘사상계’가 폐간(1970년5월)된 공백기에 나와 문학과 사상까지 아우르는 차별성을 표방했다. 기존 월간 문예지로는 1955년 창간돼 한국문단을 상징하던 ‘현대문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문학사상’은 이어령의 분방하고 자유로운 특질을 대변하듯 상대적으로 한국문학에만 올인하던 ‘현대문학’과 차별성을 띠며 해외 작가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보다 넓은 외연을 확보하는 강점을 보였다. 이 잡지가 이후 42년 동안 한 번의 결호를 제외하곤 줄기차게 달려와 이번 6월호로 500호를 기록했다. ‘현대문학’과 더불어 한국 문학 혹은 문단의 반세기를 쉼없이 기록하고 견인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기에 모자람은 없다.

“주간 자리를 제안받고 이어령 선생을 찾았더니 두 가지를 당부하더군요. 문단 어느 파벌에도 얽매이지 말고 중심에 가만히 있으라는 것과 금방 그만둘 것 같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선생이 10여년간 주간으로 재직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잡지에 투영했듯이 저 또한 색깔을 만들라는 주문이었는데, 그 빛깔이라는 게 어느 쪽에도 휩싸이지 않는 자유로운 중심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령이 ‘문학사상’을 현재 발행인 임홍빈에게 넘긴 것은 1985년 무렵이었다. 이후 이 잡지의 주간은 1988년부터 두어 번 짧은 공백기를 빼고는 본격적으로 현재까지 가장 오래 이 잡지의 조타수 역할을 해 온 권영민(66·단국대 석좌교수)이 맡았다. 문예지의 ‘주간’이란 그 잡지의 방향을 정하는 선장 같은 역할이다. 이후 20년 가까이 ‘문학사상’ 편집 주간 위치에 있었으니 그를 만나 이 잡지의 족적을 더듬고,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정년퇴임한 학자의 삶을 통해 한국문학을 엿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문학 작품이 독자로부터 외면받으면 안 됩니다. 일차로 당대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을 선정할 때 가장 고려했던 사항은 아, 이 사람이 받을 만하겠구나 싶은 독자의 기대와, 어? 이 사람이 받았네, 싶은 작가들을 적절하게 배려하는 일이었습니다. 일년 내내 발표되는 작품을 모두 따라 읽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발표작들을 읽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연말이면 독자와 전문가들이 추천한 후보작을 놓고 제가 기대한 작품을 비교하며 심사위원들과 신중하게 머리를 맞댔지요.”

‘문학사상’의 상징인 ‘이상문학상’을 먼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상업성과 화제성에 연연한다는 일각의 비판에도 이 상이 한국 독자들에게 상징적인 문학상으로 각인된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1977년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이 첫 수상작으로 선정된 이래 이청준 서영은 한승원 신경숙 윤대녕 정미경 등 한국문단의 내로라할 작가들이 이 상의 수혜자였다. 권영민이 기억하는 특별한 수상작은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 김훈의 ‘화장’이다. 이문열 수상작은 그해 30만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화장’은 단편도 그리 많이 발표하지 않은 작가에게 상을 준다는 비판에도 결과적으로 한국문학에 새로운 분위기를 마련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자부한다. 이 상과 함께 그해 가장 뛰어난 시를 대상으로 시상하는 ‘소월시 문학상’과 ‘김환태평론문학상’도 이 잡지가 후광으로 거느리는 한국 문단의 상징적인 상들이다.

“한국문학이 완전히 특수한 한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건 한국문학이 변방에 자리 잡은 외톨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한국문학은 서구문학의 모방이자 이식이고 끊임없이 뒤따라가야 하는 후진적 문학이라고 말하는 것도 짧은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1930년대 서구와 같은 반열에서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한 이상이란 문인이 있었습니다. 김유정 박태원 정지용 같은 이상 주변의 문인들도 당대에 같은 반열에서 한국문학의 출중한 한 시대를 받쳐주었던 이들입니다. 이상은 한국문학의 후진성을 단박에 극복한 인물이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개인사에 얽매여 문단의 에피스드나 일화 정도로 취급했던 거지요.”

국문학자이자 평론가로서 권영민의 삶은 ‘문학사상’ 주간이라는 문학 현장의 ‘기획자’ 역할과 함께 달리 기록해두어야 할 대목이다. 요절한 천재시인이자 작가인 이상(1910∼1937)은 ‘오감도’ 같은 난해한 작품들 탓에 역설적으로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으로 각광받았지만, 여전히 이상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해독하기 어려운 편이다. 애초 이어령이 이상을 연구해 책까지 펴낼 정도로 깊이 관여했고 권영민은 자신이 감히 그 뒤를 잊지 못하리라 처음에는 생각했다고 했다. 1997년 이상 타계 60주년 행사로 수학자와 디자인 전문가까지 동원해 대대적으로 이상 연구결과 심포지엄을 기획하고 책으로 펴낸 이래, 이상을 파고드는 대표적인 국문학자의 길을 걸어갔다. 2007년 동경대 객원교수로 가서는 1년 동안 일본 대학생들과 함께 이상이 일본어로 쓴 시를 함께 번역하고 토론하면서 이상의 정수에 다가갔다.

동경대 학생들과 더불어 이상의 시를 토론하고 번역하는 일 같은 글로벌 한국문학 체험은 권영민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덕성여대 교수에서 출발해 단국대를 거쳐 1981년 이래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기까지 미국 하버드대학과 버클리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해외 각국 한국문학 전공자들을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으로 불러들여 가르치는 일을 해왔다. 해외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치고 그에게 신세를 지지 않은 이들이 드물다. 권영민은 올여름 다시 버클리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기 위해 출국한다. 이 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 전공을 마이너 코스로 진행하다가 이번에 메이저로 격상시키기 위해 그를 초청했다고 한다.

버클리로 출국하기 앞서 다음달 서울 ‘이상의 집’에서 ‘오감도’ 발표 80주년 기념으로 많은 문인들을 모아 ‘문학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그는 2012년 서울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할 때 그동안 자신의 글쓰기가 전문 연구자들과 학생들 중심이었다는 걸 통렬하게 반성하면서 대중의 인문학 외면 사태가 자신에게도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반성을 토대로 문인들을 모아 ‘문학콘서트’를 진행했거니와, 이번 행사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향한 학자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기 앞서 치르는 의식과도 같다.

“‘문학사상’이 이어령 선생 이후 이 자리까지 온 건 그동안 나를 포함한 문단인들의 의견을 수렴해준 발행인의 역할이 큽니다. 많은 매체들이 득세하면서 이제 잡지의 시대는 저무는 것 같지만 인간의 지적 욕망이 남아 있는 한 책이란 사라질 수 없으니 잡지 또한 여전히 생명을 보살펴야 할 우리 시대의 소중한 유산이지요.”

평소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감동적이다. 늘 ‘비판적 조력자’인 아내 김옥수(62) 씨와 함께 걸으면서 하루 일어났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오래 된 행복이라고 그는 답했다. 권영민은 ‘문학사상’ 500호 권두언에 “이 자리는 한국의 문학인들이 만든 자리이며 독자 여러분이 함께 키우고 지켜온 곳”이라면서 “우리 문학의 열린 광장이 될 것을 다짐한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