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기림(金起林)의 동북제대(東北帝大) 시절
오랫동안 기다렸던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 편지 내용이 실망스럽다. 내가 찾던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대학도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했던 창고의 문서에 기대를 걸었었다. 나는 또다시 낭패감을 느꼈다.
일본의 동북지역 가장 큰 도시인 센다이(仙台)를 나는 두 번이나 찾았었다. 센다이 부근의 온천과 어울리는 풍광 대신에 나는 거기 자리 잡은 동북대학(東北大學)에 머물렀다. 그리고 대학 사료관(史料館)에서 1930년대 후반 대학 커리큘럼과 입학생 졸업생의 명단, 학적 사항 등을 조사하였다. 대학의 사무원은 매우 친절하였지만, 아주 사소한 문제도 개인정보 보호법에 의해 열람 금지사항이라고 알려주었다. 대신에 그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료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예컨대 매년 대학이 공식적으로 발간하던 안내책자인 <대학기요(大學紀要)>라든지 여러 가지 학내 잡지와 신문 등이었다. 나는 내가 찾아야 할 두 개의 이름을 손에 쥐고 마음을 조렸다. 하나는 김인손(金仁孫), 다른 하나는 김기림(金起林)이었다. 첫 번째 이름은 소화(昭和) 시대 입학생 명단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이름이 김기림의 아명으로만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았다. 대신에 김기림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었다.
김기림은 1936년 경성에서의 활동을 접어두고 일본을 떠났다. 조선일보사의 후원금으로 그가 꿈꾼 일본 유학에 다시 오른 것이다. 그는 동경 대신에 일본에서도 손꼽혔던 동북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 전공을 택했다. 김기림의 나이 스물일곱이 된 때였다. 1930년대 초반부터 김기림은 한국 문단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이자 시인이었다. <구인회> 그룹을 주도했고,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시론을 발표하였다. 함경북도 성진 태생인 그는 보성고보에서 수학한 후 처음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동북제대에 보관된 그의 학적부에는 1929년 3월 일본대학 전문부를 졸업하였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하여 1936년 2월까지 기자 생활을 유지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일본 동북제대에 입학한 것이 1936년 4월의 일이었다.
김기림이 영문학을 전공한 동북제대 문학부에는 당시 일본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영문학자 토이(土居光知) 교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인 랄프 호치슨 교수를 비롯한 두 명의 외국인 교수와 함께 일본인 고바야시(小林淳男) 교수도 영문학을 강의했다. 김기림은 토이 교수의 지도 아래 학부 3년 과정을 마쳤다. 당시 일본의 제국대학은 예과 3년 과정과 본과 3년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김기림의 경우는 동경에서 수학했던 일본대학 전문부 수료를 예과 과정 이수로 인정받아 곧바로 본과 입학이 가능했다. 김기림은 1939년 문학부 영문학 전공자로서 <학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심리학과 리차즈, Psychology and I. A. Richards>라는 졸업 논문을 제출하고 1939년 3월 26일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동북제국대학 문과회에서 펴내는 월간 학회지 <<文化>>(1939. 4)에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김기림이 영어로 작성한 이 졸업 논문이 궁금했다. 모든 졸업 논문이 문학부 영문학 전공 교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나는 영문학 전공 교실을 찾았다. 마침 조수 한 사람이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찾아온 연유를 알아들은 그 여성 조수는 연구실 벽에 걸린 토이 교수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동북대학 영문학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기네 대학의 선배 가운데 김기림이라는 한국의 저명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영문으로 작성된 졸업 논문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진에 대비한 건물 보강 공사가 몇 년째 계속 되고 있는데 전공 교실의 모든 자료들을 상자에 담아 다른 창고로 옮겨 보관중이라는 것이었다. 공사가 끝난 후 그 자료들을 다시 전공 교실로 가져다가 분류하여 놓아야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거의 일년이 넘었는데 일본 동북대학 영문학 전공 교실에서 연락을 해왔다. 학교 공사가 마무리되고 문서들을 모두 재정리하였지만 김기림의 졸업논문은 찾지 못했단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종전 때까지의 학적 관계 문서 가운데 불행하게도 학생들의 졸업 논문 원본이 대부분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학교 당국으로부터 확인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기림이 공력을 다했던 졸업 논문은 이제 다시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다.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