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찾은 정지용의 시 <추도가(追悼歌)>
시인 정지용이 남긴 시 한 편을 새로 찾았다. <추도가(追悼歌)>라는 제목으로 1946년 3월 2일 대동신문(大東新聞)에 실린 작품이다.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를 위해 쓴 것으로 행사용 가창곡의 가사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지용은 해방 직후 시를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애국(愛國)의 노래>(대조, 창간호, 1946. 1), <그대들은 돌아오시다>(혁명, 창간호, 1946. 1), <곡마단(曲馬團)>(문예, 7호, 1950. 2), <늙은 범 외 (4 4조 5수)>(문예, 8호, 1950. 6) 등이 그동안 조사되었던 전부이다. 그러니 이 한 편의 시가 새로이 연보에 추가될 수 있게 된 것이 반갑다. 작품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국토(國土)와 자유(自由)를 잃이우고
원수(怨讐)와 의(義)로운 칼을 걸어
칼까지 꺾이니 몸을 던져
옥(玉)으로 부서진 순국열사(殉國烈士)
(후렴)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2
조국(祖國)의 변문(邊門)을 돌고 들어
폭탄(爆彈)과 육체(肉體)와 함께 메고
원수(怨讐)의 진영(陣營)에 날아들어
꽃같이 살어진 순국열사(殉國烈士)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3
조차 뼈 모다 부서지고
최후(最後)의 피 한 점 남기까지
조국(祖國)의 혼령(魂靈)을 잘지 않은
형대(刑臺) 우에 성도(聖徒) 순국선열(殉國先烈)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4
소년(少年)과 소녀(少女)와 노인(老人)까지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부르지저
세계(世界)를 흔들고 적탄(敵彈) 앞에
쓰러진 무수(無數)한 순국선열(殉國先烈)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정지용은《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년)을 통해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가장 빛나는 시 정신의 하나로 기억된다. 그의 언어적 절제와 뛰어난 감각, 시적 대상과 자아와의 긴장 등은 한국의 현대시가 도달했던 시적 성과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지용이 1930년대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시문학》에서부터 《文章》으로 이어지는 문학사적 흐름을 주도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시 창작을 지속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시를 쓰는 대신에 정치적 현실에 더욱 민감했고,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더욱 열정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념의 대립과 분열이 거듭되는 현실 상황 속에서 끝내 ‘백록담’처럼 차고 맑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백록담’이 아닌 ‘대하장강(大河長江)’의 현실을 꿈꾸고 있었던 것일까? 해방 공간에서 그가 시를 잃어버린 대신 새롭게 얻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제시대에 내가 시니 산문이니 죄그만치 썼다면 그것은 내가 최소한도의 조선인을 유지하기 위하였던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방 덕에 이제는 최대한도로 조선인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것이겠는데 어떻게 8.15 이전같이 왜소위축한 문학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이랴?
자연과 인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 문학에 간여하여 본 적이 없다. 오늘날 조선문학에 있어서 자연은 국토로 인사는 인민으로 규정된 것이다.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은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 사춘기에 연애 대신 시를 썼다. 그것이 시집이 되어 잘 팔리었을 뿐이다. 이 나이를 해가지고 연애 대신 시를 쓸 수야 없다. 사춘기를 훨석 지나서부텀은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려 시를 썼다. 그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이다. 그러니까 나의 영향을 다소 받아온 젊은 사람들이 있다면 좋지 않은 영향이니 버리는 것이 좋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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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문학에 생활이 있고 근로가 있고 비판이 있고 투쟁과 적발이 있는 것이 그것이 옳은 예술이다. 걸작이라는 것을 몇 해를 두고 계획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불멸에 대한 어리석은 허영심이다. 어떻게 해야만 옳은 예술을 급속도로 제작하여 전국 투쟁에 이바지하느냐가 절실한 문제다. 정치와 문학을 절연시키려는 무모에서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나온다면 무릇 정치적 영향에서 초탈한 여하한 예술이 있었던가를 제시하여 보라.
(정지용, 《산문》 동지사, 1949, p. 28~32)
정지용이 자신의 시적 경험을 시대상의 변화에 비춰 반성적으로 회고 있는 이 글은 해방 공간에 서 있던 한 시인의 내면적 자기 모색의 단면을 보여준다. 정지용은 일본 식민지 말기 잡지《문장》이 폐간될 무렵을 자신의 시적 생활 가운데 가장 피폐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정치감각과 투쟁의욕을 시에 집중시키기에는 그 자신이 무력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오직 왜소위축한 시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발전과 비약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그도 최대한도의 조선인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가 시를 버리고 산문의 현실로 뛰어든 것은 ‘막대한 인민의 호흡과 혈행과 함께 문화검열에서 전진’하기 위한 일이라고 한다. 해방 이전의 자신의 시를, 아니 한국의 문학 모두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시인 정지용은 민족문학의 노선과 민족의 정치노선이 결코 이탈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시의 문화적 전위의 입장을 고집한다. 그러나 건국투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를 강조하고 있는 정지용 자신은 사실 시의 창작에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문화적 전위로서의 시란 설명만으로 가능할 뿐 실제로는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권영민, 200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