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김환태와 시인 정지용
비평가 김환태와 시인 정지용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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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는 김환태문학관을 개관한 후 첫 번째로 열리는 문학행사입니다. 권영민의 문학콘서트를 이 아름답게 세워진 무주의 김환태문학관에서 열게 된 것이 매우 기쁩니다.
비평가 김환태는 1909년 11월 29일 전북 무주군 무주면 읍내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무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전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휴학하고 1926년에 서울 보성고보에 편입하였는데, 당시 보성고보 상급반에는 이상(김해경), 임화(임인식) 등이 재학 중이었고, 김기림이 동급생이었습니다. 1928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예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라고 여기서 시인 정지용을 만나 문학적 교분을 쌓게 되었지요. 1931년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 법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며 본과 3년 과정을 마치고 1934년 졸업하였습니다. 귀국 후부터 비평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36년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이상 등이 주도하고 있던 <구인회>에 가입하였습니다. 1938년 한때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1940년부터 서울 무학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이 시작되자 절필하였습니다.
김환태의 비평가적 위상은 1930년대의 문학적 현실을 떠나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김환태가 주장했던 문학의 순수 문제가 문학과 예술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예술적 자율성과 그 가치의 옹호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입니다. 그러나 1930년대 문학의 전체적인 흐름을 놓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 새로운 비평적 담론의 성격을 제대로 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김환태의 비평은 《시문학》(1930), 《시인부락》(1937) 등을 비롯한 여러 문학지의 발간 과정과 <구인회>(1933)와 같은 동인 조직의 형성 배경 등에 어울어지면서 하나의 새로운 문학적 경향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당시에는 계급문단의 붕괴로 인하여 집단적인 조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집단적 이념 추구의 경향이 사라지고 문학의 리얼리즘적 경향이 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김환태는 <구인회> 그룹에 참여하면서 집단적 이념보다 개인적 정서를 중시하기 시작한 소그룹 중심의 문학 활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지요. 이같은 문단의 변화는 흔히 모더니즘 문학의 등장이라는 명제로 그 역사적 성격이 규정되고 있습니다. 김환태는 이 새로운 문단적 경향의 한복판에 서서 새로운 비평의 활로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식민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확립을 위한 새로운 지평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문학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인 문학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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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문단에서 김환태 비평의 문학주의적 성격은 그의 실천적인 비평작업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김환태의 비평적 관심의 중심에는 언제나 시인 정지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지용에 대한 김환태의 관심은 그의 짧은 비평활동으로 볼 때 유별난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함께 수학한 적이 있는 두 사람은 귀국 후 <구인회>의 조직을 통해 새롭게 문학적으로 재회하였으며, 순수주의를 지향하는 비평적 관점과 시를 통한 창작적 실천이라는 균형 잡힌 대응 관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환태에게 있어서 정지용은 누구인가? 다음과 같은 김환태의 진술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내가 일본 내지에 유학한 것은 교토에서 3년 후쿠오카에서 3년, 전후 6년 동안이다. 그 중에서도 교토시대의 3년은 나의 오랜 학창시대를 통하여 가장 유쾌했던 시대이다. 이에 교토 시대에 있었던 일로 지금 추억되는 몇 가지만 적어 보겠다.
그때 나는 도쿄까지 가는 길이었는데, 우리 고향 친구 K와 Y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찾아 2, 3일 쉴 양으로 그곳에 내렸었다. 그랬던 것이 이 두 친구를 떨어질 수가 없고 또 전려우아(典麗優雅)한 이 옛 도읍을 떠나가기가 싫어서 D대학 예과를 들어가게 되었다.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재학생들이 신입생 환영회를 열어주어 그 자리에서 처음 시인 정지용씨를 만났다. 나는 그이 시를 읽고 키가 유달리 후리후리 크고 코끝이 송곳같이 날카로운 그런 사람으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키는 5척 3촌밖에 되지 않았고 이빨만이 남보다 길었다. 그날 그는 동요 <띠>와 <홍시>를 읊었다. 그 후 어떤 칠흑과 같이 깜깜한 그믐날 그는 나를 상국사(相國寺) 뒤 끝 묘지로 데리고 가서 <향수>를 읊어 주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황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이 노래는 나에게 그지없는 향수를 자아내 주었다.
그래서 그는, 향수에 못 이겨 곧 하숙으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나를 데리고 사조(四條) 어떤 찻집으로 가서 칼피스를 사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또 어떤 초여름 석양에 그는 나와 압천(鴨川)을 거닐면서 <압천>을 읊었다.
압천(鴨川) 십리(十里)ㅅ 벌에
해는 저물어......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젔다......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짜는 한 사람의 마음
쥐여짜라. 바시어라. 시원치도 않아라.
역구풀 우거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 쌍 떴다
비마지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鴨川) 십리(十里)ㅅ 벌에
해가 저물어......저물어......
이 시가 노래한 그 시간의 풍경 속에서 작자 그 사람의 입으로 읊는 것을 들을 때 이 시가 주는 감명은 말 할 수 없이 깊었다. 이리하여 <압천>은 <향수>와 함께 정지용 시 중에서 가장 나에게 친숙한 시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그는 금단추 다섯 개를 떼어버리고 새파란 세비로 양복을 지어입고 ‘참벌처럼 닝닝거리며’ 귀향했다. 공처럼 퐁퐁 튀어 다니는 그의 그림자가 교정에 보이지 않을 때 한동안은 퍽 적적했다.
(김환태, 경도(京都)의 3년, 1936. 8)
위의 진술에 드러나고 있듯이 김환태가 정지용을 처음 만난 것은 도시샤(同志社)대학에 입학한 1928년 봄입니다. 1931년 동지사대학 예과 수료후 규슈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34년에 졸업하고 귀국합니다. 김환태는 당초에 동경 유학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토에 들러 고향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교토의 도시샤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당시 도시샤 대학에 재학 중이던 시인 정지용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정지용은 1923년 4월에 도시샤 대학에 입학하였으며, 대학 재학 중이었던 1926년 무렵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고, 1929년 봄 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습니다. 그러므로 김환태가 정지용과 처음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동지사대학에서의 두 해 정도입니다. 김환태와 정지용의 첫 만남은 기성의 시인과 문학도의 만남이라고 할 만합니다. 정지용의 싯구 하나하나가 김환태의 문학적 감성을 자극하게 되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김환태와 정지용의 만남은 일본 유학 과정에서 만난 동문의 선후배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를 준비하는 한국의 새로운 문학적 감성들이 이러한 만남을 통해 싹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환태는 학업을 모두 마치고 1934년 귀국했습니다. 도시샤 대학 예과를 수료하고 규슈제국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우리 문단에 처음 발표한 <문예 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1934. 4)는 비평의 가치를 예술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김환태의 비평적 과심과 그 방향을 암시하기도 하는 이 글에서 김환태는 비평이라는 것을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인간정신의 노력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러한 규정은 당대 프로 비평의 이념 편향에 대한 그의 비판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비평이라는 것이 작품의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매슈 아놀드의 이른바 <몰이해적 관심>으로 작품에 접근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으며, 예술가로서의 비평가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평가는 작품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 작가와의 내면적 일치에 도달할 수 있는 상상력과 감상력을 지녀야 한다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결국 이 글은 비평이 그 관심을 문학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성이 아니라 예술성에 두어야 하며, 문예창작의 방향을 주도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로움을 속박할 것이 아니라 예술의 뒤를 따라가면서 창조적 정심의 도정의 뒤를 따라야 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환태의 비평적 관점은 <비평문학의 확립을 위하여>(1936. 4)에서 더욱 분명한 문학주의적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글에는 현실 문단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문학비평의 대상이 사회도 정치도 사상도 아니요 문학이라는 명제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문학비평은 다른 무엇이 아닌 문학 자체를 대상으로 그 고유한 특성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므로 정치이론과 동질적인 사회이론이 문학비평을 대신해온 지금까지의 문학 풍토는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주장의 핵심입니다. 이 글에서 김환태는 ‘진정한 비평은 창작방법을 가르치고 창작과정을 감시하는 대신에 작가의 창작력의 성장과 발현을 위하여 그에 필요한 분위기와 관념의 계열을 준비한다.’라고 천명한 바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 따라 문학비평이란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보려는 인간정신의 노력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는 김환태는 실제 비평에서 정지용, 김상용, 김기림 등의 시에 대한 분석적 비평을 통해 방법론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매슈 아놀드, 페이터, 포우, 랑송 등의 문학론을 통해 그 미학의 이론을 구체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김환태의 비평은 흔히 인상주의 비평과 혼동되곤 합니다. 그의 비평은 작품에서 얻은 인상을 재구성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평 자체의 세련된 문체와 감수성을 특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평은 논쟁적이라기보다는 창조적 예술성을 지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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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태가 자신의 비평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한국 문단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은 정지용과의 만남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환태는 귀국 직후 자연스럽게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이상 등과 교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지용의 권유로 <구인회>에 가담하였고, 이 새로운 문단적 기반을 통해 적극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합니다. 그는 특히 시적 정서와 언어적 감각의 조화를 추구하고 있던 시인 정지용을 통하여 자신의 비평적 관점과 방법을 실천적으로 확대 심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서 있던 정지용의 시는 자연을 통해 자신의 주관적인 정서와 감정의 세계를 토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서 자연에 대한 자신의 감각적인 인식 그 자체를 언어를 통해 새롭게 질서화하고 있습니다. 정지용이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시법으로서 가장 중요시되어야 하는 것은 예리하고도 섬세한 언어적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의 언어에 대한 자각은 물론 그 이전의 김소월이나 동시대의 김영랑의 경우에도 그 중요성이 인정됩니다. 이들은 모두 시를 통해 전통적인 정서에 알맞은 율조의 언어를 재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정지용의 경우 이들과는 달리 율조의 언어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의 조형성(造型性)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그는 시의 언어를 통해 음악적인 가락의 미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조형의 미를 창조합니다. 이 같은 특징은 언어의 감각성을 최대한 살려내고자 하는 시인의 노력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정지용은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철저히 배제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시적 대상을 소묘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자연 그 자체를 공간적으로 재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인간이 그 속에 의존하거나 동화하는 세계가 아니지요. 정지용은 자연 그대로의 질서와 자연 그대로의 미를 추구합니다. 정지용이 그의 시를 통해 발견한 이러한 자연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환태는 시의 본질 문제에 대한 평문들을 발표하면서 이같은 정지용의 시의 특질을 주목하고 자신의 비평적 논리를 위해 그 전범으로 언제나 정지용의 시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그가 발표한 <시와 사상>(1935. 2)에서는 형식과 내용의 통일, 주제와 형식의 완전한 통합의 예로 정지용의 시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그가 쓴 <정지용론>(1938. 4)은 정지용의 시적 특질을 가장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는 실천비평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는 정지용의 시에서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적 감각이 곧 시의 정서가 되고 풍부한 정서가 곧 시적 감각이 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지적한 비평가입니다. 그는 시라는 것이 흔히 감정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그 감정에 질서와 균형을 부여하는 힘, 즉 지성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감각적 요소를 통일시키고 그것들을 조화시키는 힘을 그는 지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성의 시인으로 정지용을 지목하고 있습니다.
정지용은 지성을 가장 고도로 갖추고 있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일이 없이 그것이 질서와 조화를 얻을 때까지 억제하고 기다린다. 그리고 감정의 한 오라기도 감각의 한 조각도 총체적 ㅌ콩일과 효과를 생각하지 않고는 덧붙이지도 깎지도 않는 것은 물론 가장 미미한 음향 하나도 딴 그것과의 조화를 그리고 그 내포하는 의미와의 향응을 고려함이 없이는 그의 시 속에서의 호흡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략) 그의 가장 천재적인 근본적 특질은 그의 순수한 감정에도 그 화려한 감각에도 있지 않은 것은 물론 그의 감정의 감각적 결정에도 있지 않고 그의 감정과 감각과 이지의 그 신비한 결합에 있다.
(김환태, 정지용론)
김환태는 정지용의 시에서 지성과 감각과 감정의 미묘한 하모니를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비평이 그 논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는 문학을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입니다. 김환태는 정지용을 만남으로써 자기 비평의 논리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고, 정지용의 시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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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의 덕유산 국립공원 입구에 ‘눌인김환태문학비’가 서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1930년대 한국 문단에서 이른바 순수비평이라는 개념을 내걸고 근대문학비평의 지표를 새롭게 제시했던 비평가 김환태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1986년 5월 문학사상사가 주관하여 건립한 이 기념비의 전면에 다음과 같은 김환태의 문구가 시인 박두진의 글씨로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상징의 화원에서 노는 한 마리 나비고자 한다. 아폴로의 아이들이 가까스로 가꾸어 형형색색으로 곱게 피워놓은 꽃송이를 찾아 그 미에 흠뻑 취하면 족하다. 그러나 그때의 꿈이 한껏 아름다웠을 때에는 사라지기 쉬운 그 꿈을 말의 실마리로 옮겨 놓으려는 안타까운 욕망을 가진다. 그리하여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 소위 나의 비평이다.
(김환태, 1940년 1월 1일 평단 전망)
눌인김환태문학비를 세운 지 25년이 되는 올해 6월 김환태문학관이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김환태 비평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그 정신을 기리고자 무주군이 앞장서서 건립한 문학관입니다. 한국의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경제적 여건이 가장 열악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무주군이 군민들의 뜻을 모아 이 문학관을 개관한 것은 높이 치하할 일입니다. 현대식 건물로 만들어진 이 문학관은 김환태와 그의 시대를 동시에 조명할 수 있는 다채로운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학사상사가 주관하고 있는 김환태평론문학상의 역대 수상자들까지 함께 진열함으로써 김환태 비평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폭넓게 계승 발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앞으로 이 문학관이 지역의 문화와 한국 문학비평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알차게 운영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이제 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문학비평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관점을 함께 드러낼 수 있는 문학의 전체적인 모습을 균형잡아 주고, 그 범위를 확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비평적 방법의 수립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물론 문학비평의 방법은 그 대상으로서의 작품이 없으면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며, 비평의 방법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결국 다시 작품으로 떳떳이 돌아오고자 하는 목표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환태의 주장 그대로 문학비평의 확립이란 그 방법론의 모색이 어느 정도 성공적이냐를 따지는 데에서 만족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방법론의 적용이 얼마나 작품의 의미에 활기를 불러일으켜 주느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환태
1909년 김종원의 장남
1926-28 보성고보 졸업
1928년 교토 동지사대학 예과 입학
1931년 동지사대학 예과 수료후 후쿠오카 구주제국대학 본과 영문학과 입학
1934년 졸업후 귀국 보성고보 선후배 사이인 이헌구 이상 등과 교유 정지용과 가까이 지냄
1936년 구인회 가입 / 6월에 박봉자 씨와 결혼
결혼 사진 함대훈 이동구 이헌구 박용철 등 과 김갑순 윤성덕 등이 보임
1938년 황해도 명신중학교 교사
1940년 무학여고 교사
1943년 무주로 낙향
1944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