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정신과 이념의 잣대
1930년대의 시인 김기림의 시 가운데 <나비와 바다>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매우 특이한 시적 정서를 내포한다. 감상성이라고 불리던 정서적 특성을 거부하고 대상에 대한 지적 인식을 문제삼고자 했던 시인 김기림은 이 시에서 시적 공간으로서의 바다를 독특한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감정의 절제는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 시의 시적 구조는 이미지의 공간적인 배치를 통하여 그 특징이 드러난다. 이 시에서 시인이 눈앞에 두고 있는 대상은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이다. 이것은 누구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자연 현상이지만, 시인은 이 평범한 시적 대상을 경험적 인식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적 이미지로 환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청무우 밭과 흰나비이다. 청무우 밭 위를 나르는 흰 나비의 형상을 시인은 푸른 바다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오는 파도와 연결시키고 있다. 대상의 시적 변용이란 바로 이를 두고 말함이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3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이 펴낸 시집 <<바다와 나비>>(1946)에 수록되어 있는 시 <바다와 나비>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올랐던 일이 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근대시의 고질이었던 감상성을 제거시킨 대신 명징한 이미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미지의 역동성과 그 시적 변용이 놀라운 감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바로 이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가 교과서용으로 적절한가를 놓고 크게 문제되기도 했다. 검찰 당국이 중고교 국어와 국사 교과서를 검토한 후 이 시를 포함하여 일부 필자의 글이 우리나라의 체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거나 학생들에게 가치 혼란을 줄 수 있다며 교과서에서 삭제해 줄 것을 교육부에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대검과 교육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검찰에서는 이 작품을 대검 산하의 민주이념연구소(그런 연구소에서 무슨 연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문위원인 전문가들의 검토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었고, 이 글의 직접적인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성향이나 글에 숨겨진 의도 등에 대해 중점적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신문들이 보도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좌익문단에 가담하였던 김기림의 문학적 경향이 학생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요즘도 교육 현장에서 논란의 대상 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당시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행해지는 공권력의 검열 행위가 일종의 강압적인 이념적 요구로 비춰졌던 것은 물론이다.
문학 작품의 내용과 가치에 대한 판단은 문학 연구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에 의해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도록 되어 있다. 앞의 사례에서처럼 검찰에서 교과서의 수록 작품들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들은 문학적인 것의 기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이 학생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게 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문학을 고정된 하나의 이념의 잣대로 보면 모든 작품들이 그 기준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특정한 이념을 편드는 문학은 벌써 문학이 아니라 선전물이다. 그러므로 문학다운 문학은 어떤 가치 기준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며,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속박되지 않아야 한다.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신은 법의 정신과 서로 다를 수가 있다. 법은 어떤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문학은 문학 자체의 의미를 중시한다.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의 자율성은 법 정신의 타율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서양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법은 의복과 같아야 한다.’ 는 것이다. 법의 본질을 놓고 이처럼 절실하게 비유한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법은 그것이 봉사해야 할 사람들의 몸에 꼭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 주장이야말로 법 정신의 참주제를 꿰뚫고 있는 셈이다. 법이라는 말은 그 글자의 형상이 재미있다. ‘법(法)’이라는 한자의 형상을 보면 ‘물이 흐르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물(水)’이라는 말과 ‘가다(去)’라는 말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법이라는 말이다. 물은 만물의 이치를 상징한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놓고 법의 본질적인 개념을 생각한 것이라면, 법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법이라는 것이 바로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면, 법은 흐르는 물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이 너무 완고하여 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게 물길을 막으면 물은 둑을 타고 넘치기도 하고, 홍수를 이루어 농삿터를 망치기도 한다. 너무 높고 견고하게 물을 막아놓으면, 흐름을 잃은 물이 고인 채 썩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법은 물을 흐름을 막는 것 보다 오히려 그 흐름을 제대로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막기 위한 법보다 제대로 길을 터주기 위한 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장 엄격한 법이야말로 가장 나쁜 해악이라고 말한 서양의 학자가 있다. 법을 제대로 모르는 관리가 볼기로 위세 부린다는 우리네 속담도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문학은 법이 요구하는 규범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학은 언제나 열린 정신을 지향한다. 문학 작품은 유일한 해석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의 의미는 언제나 다양하게 인식되는 것이며, 작품을 보는 이의 입장과 각도와 관심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의미가 항상 새롭게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의미라는 것이 항상 새롭게 인식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어떤 문학 작품도 하나의 의미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의 의미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은 그 의미와 가치를 하나의 잣대나 기준만으로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법은 이와 다르다. 법은 언제나 하나의 규범과 기준에 의해 적용된다. 법이 지켜나가야 할 하나의 기준이 무너지면, 법은 그 시행의 공정성을 잃게 된다. 하나의 기준을 고집하는 법의 논리가 다양한 기준을 필요로 하는 문학의 논리와 대응하기는 어렵다. 문학은 법대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대로 판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생각을 한 가지로 묶어 두지 않고,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 속에 열어 둔다. 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문학의 정신이 지향하는 자유로움을 부정하고 특정의 이념적 요구에 의해 그것을 속박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도전이다. 아니 가장 자유로운 인간 정신에 대한 부정이다. 이념의 잣대를 내세워 문학의 정신을 억압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패일 뿐이다.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