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만해와 백담사 그리고 오현스님

문학콘서트 2013. 3. 2. 17:46

설악의 백담 계곡은 언제나 아득하다. 여름 산사의 정취를 이곳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은 다시없다. 골은 깊고 물이 빠르고 산은 높푸르다. 그러나 험준한 설악의 계곡임에도 골골이 사람을 품을 만큼 넉넉하다. 여름내 계곡의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가 서늘한 바람을 일으킨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을 열던 해였다. 나는 백담사를 찾았다. 만해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나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만해 한용은 19193.1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이 바로 이 백담사다. 그는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썼다. 시집 <님의 침묵>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다. 정규 학교에서의 수학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던 만해가 일상적인 한국어를 이용하여 써내려간 89편의 시들은 그 시적 형식과 주제에 있어서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폭과 깊이를 가졌다. 이 깊은 계곡의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내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나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아주 소중한 노스님을 한분을 만나뵙게 되었다.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의 형상처럼 그윽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경내로 들어서면서 합장하는 내게 무얼하는 사람인가 물었다. 나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문학평론을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는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뵙는 분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내가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저 웃고 말았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니까요.”

나는 어이가 없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 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다. 내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그 노스님이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신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평론이라는 것은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이라는 것을 빌어다가 남의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승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잡아주신다. 나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나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그만 기가 죽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나는 마치 크게 한번 한방이라도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다.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준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란다. 나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었다. 나는 매년 여름 백담사를 찾는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다. 거기 설악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친다.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