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주변/한국문학의 풍경

마샬 필 교수에 대한 추억

문학콘서트 2013. 2. 23. 17:28

미국의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쳤던 마샬 필(MARSHALL R. PIHL) 교수는 1995711일 세상을 떠났다. 필 교수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분이다.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 기반이 거의 없는 미국에서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 출간하고 학생들을 키워온 그동안의 노력을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마샬 필 교수는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 출신이다. 19604.19 학생 혁명 직후에 그는 서울로 유학을 와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였다. 이미 고인이 되신 서울대학교의 정병욱 교수와 연세대학교의 김동욱 교수로부터 판소리에 대해 강의를 들은 후, 그는 판소리의 독특한 예술 형태에 매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서울 유학을 마친 후에 다시 하버드대학으로 돌아가서도, 그는 한국의 판소리 연구에 전념하였고, 한국문학 작품의 번역 소개에도 힘을 기울였다.

1976년에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심청가의 음악적 형식과 그 사설 구조를 관련시켜 연구한 판소리 심청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문학 전공의 박사학위를 미국의 대학이 수여한 최초의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마샬 필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한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하여 안정적인 연구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가 되었지만, 한국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대학이 당시에는 미국 본토에 한군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샬 필 교수는 대학생 시절 한국어를 배우면서부터 학문적인 동지가 하나도 없이 고독과 싸워야했다. 한국전쟁이 막 끝이 난 후, 한국어 강좌가 처음 하버드 대학에 개설되었다. 한국어를 처음 가르친 교수는 한국 역사 학자인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였다. 그는 와그너 교수의 한국어 강좌 첫학기 내내 유일한 수강생이었다. 그는 가족들 모두가 말리는 한국어 공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마샬 필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초의 일이다. 하버드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년동안 연구생활을 하게 되었던 때이다. 마샬 필 교수는 하버드의 한국문학 강사였다. 마침 내가 머물렀던 바로 그해 봄에 하버드에 처음으로 한국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마샬 필 교수와 나는 새로 생긴 이 강좌가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막상 강좌를 열고 보니, 학생이 겨우 세명 뿐이었다. 한국문학 강좌는 당연히 정식 강좌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강좌를 폐강하지 않고 계속하였고, 한국문학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서로 깊이있게 토론하였다. 그리고 내가 펴낸 해방 40년의 문학 -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유형의 땅 (LAND OF EXILE)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마샬 필 교수가 하와이 대학의 정식 교수로 채용되었을 때, 이미 오십대 후반이었다. 그는 아주 기뻐하면서 그 즐거운 소식을 내게 전했다.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렸던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늦은 것은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를 드렸다. 그리고, 마샬 필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하와이대학을 중심으로 우리는 함께 국제한국문학회도 만들었고, 한국문학의 해외소개를 위해 국제회의도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최근에는 영문판 한국문학총서 6(미국 콜럼비아대학 출판부)을 공동 편집하게 되었다.

마샬 필 교수가 환갑을 맞았을 때 나는 환갑을 축하드리면서 환갑 이후 덧붙여지는 나이는 거꾸로 감산하여 나가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앞으로 몇년이 지나면 마샬필 교수와 내가 동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는 너무나도 반가워하며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마샬 필 교수가 하와이대학에 자리잡은 후에 학생들 사이에도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마샬 필 교수는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작품의 번역 소개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의 관심사였던 판소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판소리 연구는 판소리의 사설과 그 음악적 형식의 결합에 대한 질문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필 교수가 펴낸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국의 소리꾼(KOREAN SINGER OF TALES)은 그의 반평생의 연구를 집약시켜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판소리 광대의 연원과 그 사회적인 신분의 변화를 통해 판소리의 공연형식의 예술적인 변천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지배계층을 패트론으로 하여 발전한 판소리가 오히려 지배층의 권위와 가치에 도전하면서 평민 대중을 상대로 하는 민중예술로 확대되는 과정을 그는 판소리의 내적인 구조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하였다.

책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책의 부록 덧붙여져 있는 영역본 판소리 심청가이다. 심청가의 여러 판본을 검증하여 판본을 확정하면서, 마샬 필 교수는 20여년에 걸쳐서 그 번역 작업을 해왔다. 판소리 사설의 까다로운 고사와 난해한 한문 구절의 의미를 풀어놓는 일도 힘든 것이었지만, 사설에 섞인 전라도 사투리를 제대로 해독하는 작업이 더 큰 어려움이었다. 그는 심청가의 사설을 창()으로 노래불려지는 부분과 아니리로 서술되는 부분을 구별하여 놓았다. 그리고, 그 운문적인 특성과 산문적인 특성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영어 번역에서도 각각 시적인 운문체와 소설적인 산문체를 활용하였다. 그 결과로 이 영역본을 통해서도 판소리의 문체의 이중성을 쉽게 식별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이 영역본으로 판소리를 읽게 되는 독자들에게 판소리의 구성적인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마샬 필 교수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국의 소리꾼은 그의 마지막 업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이야말로 해방 이후 이루어진 한국문화예술의 해외 소개 작업 가운데 가장 빛나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샬 필 교수가 다하지 못한 일들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후학들의 노력에 의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외롭게 한국문학 연구의 길을 살아오신 마샬 필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에 다시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릴 뿐이다. (권영민)